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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방영회 | 방영일 | 방영시간 | 상세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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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1999, 11회 | 19991212 | 58분 | 상세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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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통폐합과 언론인 강제 해직> 내용
1980년의 언론통폐합은 한국 언론계를 뒤바꾼 일대 사건이었다. 또한 언 론통폐합을 전후해 발생한 1,000명이 넘는 언론인 강제해직은 지금도 그 상처를 남기고 있다. 1988년 국회 청문회와 1996년 5.18 특별법에 의한 검찰수사를 통해 언론통폐합과 언론인 강제해직은 신군부가 자행한 내란 의 한 부분으로 정리된 바 있다. 권력이 언론을 상대로 강압적인 재편을 도모하고 이로써 언론장악과 함께 권언유착의 뿌리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1980년 언론통폐합과 언론인 강제해직. 신군부는 왜 그와 같은 무리수를 두어야만 했는가. 또 그 와중에 언론계 내부와 학계에서의 조력자는 없었는가. 일부 언론사주는 피해자이기만 했 는가. 해직된 언론인들은 왜 지금까지 배상을 받고 있지 못하는가. 언론 통폐합이라는 잘못 꿰어진 단추로 우리 언론계 현실은 파행과 왜곡으로 치달았다. 오늘날 언론개혁의 과제가 사실상 그때로부터 기인됐다는 지적 이 뼈아픈 지금, 언론통폐합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의미는 예사롭지 않다. 00:00- 타이틀 00:14- 프롤로그 - 휴전선 고엽제 문제가 주요 의제로 다뤄진 11월 23일 국회 국방위 - 신군부에 의한 언론 사전 검열 . 휴전선 고엽제 관련 기사 삭제 03:13- 전CM 06:31- 보안사 강압에 의해 포기각서 쓴 언론 사주들 - 장기봉, 김관석 인터뷰 08:54- 방송사, 신문사에 단행된 언론통폐합 - 황인용, 이원홍 인터뷰 13:52- 1988년 국회 언론 청문회 - 김태홍 인터뷰 15:04- 신군부에 의한 신문 사전 검열과 그에 대립한 언론 - 김성수, 김동선 인터뷰 - 신군부의 언론 검열 - 검열거부의 움직임 21:29- 대규모 언론인 강제 해직 - 이경일, 임동훈, 정상모, 권정달, 이상재 인터뷰 - 강제 해직에 관한 의혹들 . 박석무, 이경일, 이수정 인터뷰 32:00- 언론의 전두환 영웅만들기 33:29- 80년 언론통폐합 - 이철, 이웅희, 권정달, 박종식, 김관석 인터뷰 - 언론 사주의 포기각서 조작 의혹 - 당시 주체 세력들의 80년 언론통폐합 평가 . 허문도, 허화평 인터뷰 45:31- 80년 언론통폐합이 갖는 의의 - 변모한 권력과 언론의 관계 - 병석의 장인영(당시 시사통신 기자) 모습 55:36- 다음회 예고 56:24- 후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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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1999, 10회 | 19991128 | 50분 | 상세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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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의 침묵, 김형욱 실종사건> 내용
중앙정보부 부장을 7년이나 지내며 불가능해 보였던 3선 개헌을 성공시 켜 유신정권의 막을 여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김형욱은 돌연 중앙 정보부 부장에서 해임되고 미국으로 망명한다. 이후 유신철폐와 反박정희 를 부르짖으며 미 의회에서 박정희 정권의 비리를 폭로하고 5?16쿠데타 이후의 자신과 박정희에 관한 회고록 집필에 열중한다. 그러던 1979년 10월 7일, 김형욱은 파리에서 실종된다. 그의 실종에 대 해 온갖 추측들이 난무했지만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실종은 미 스터리로 남겨진 채 세인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져 가고 있다. 아무도 그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고 기억하려 들지 않는다. 과연 그는 왜, 어디서, 누 구에 의해 사라졌는가? 00:00- 타이틀 00:27- 프롤로그 02:20- 전CM 05:52- 문명자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출판 기념회 - 문명자(전 백악관 출입 기자) 인터뷰 09:14- 미국 망명 당시 김형욱의 집(미국 뉴저지주 알파인) - 파리의 실종 전 묵었던 호텔 11:54- 주섭일(당시 중앙일보 파리특파원) 당시 이야기 - 박중길(당시 동아일보 파리특파원), 신용석(당시 조선일보 파리특파원) 인터뷰 17:15- 일본 '주간문춘'의 관련 기사(박정희가 살해) - 김상현(당시 신민당 국회의원) 인터뷰 19:59- 미 의회 청문회 증언과 회고록에 관련해 정부와 협상 - 유영수(당시 협상중재자) 인터뷰 23:49- 김형욱에게 보낸 김재규의 서신(77년 6월) 25:08- 김경재(국회의원, 김형욱 회고록 집필자) 인터뷰 - 파리경시청 언론담당관과의 통화 내용 29:59- 미국의 김형욱(전 중앙정보부장의 집) 방문, 인터뷰 거절하는 부인 31:00- 방준모(전 중앙정보부 감찰실장) 인터뷰 - 송진섭(전 안산시장, 10.26 후 박선호와 함께 수감), 강신옥 (10.26 당시 김재규 변호인) 인터뷰 36:03- 당시 일본인 취재기자 전화 인터뷰 - 문명자(당시 미국 백악관 출입기자), 최세현(당시 주일공사) 인터뷰 39:06- 김도업(당시 대한항공 파리지사 근무) 인터뷰 - 김명섭(한신대학 국제외교학과 교수) 인터뷰 41:30- 김형욱을 보호하지 않았던 미국의 입장 - 이삼성(카톨릭대학 정치외교학과 교수) 인터뷰 45:55- 이상열(주 프랑스 한국대사관 공사)과 접촉 시도 46:41- 에필로그 48:11- 다음회 예고 48:58- 후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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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1999, 9회 | 19991114 | 55분 | 상세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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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사건의 진실> 내용
1950년 7월 말, 충북 영동 노근리에 이루어진 미군의 무차별적인 폭격. 폭격 명령을 받은 적도 없으며, 피난민들이 먼저 공격을 했다는 당시 참전 미군의 입장과 계획적인 살상이라는 생존자들이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 노 근리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본다. 00:00- 타이틀 00:14- 프롤로그 01:45- 전CM 06:17- 당시 현장에 있었던 에드워드 데일리와 노근리 생존자들과의 첫대면 09:55- 노근리 철로에서 벌어진 민간인을 향한 미군기의 폭격과 기관총 사격 - 노근리 철로 위의 민간인들을 향한 미군기의 폭격 . 생존자들의 증언 - 폭격을 피해 배수로로 달아나는 사람들을 향한 기관총 사격 - 사단일지에는 기록되어있지 않은 노근리 사건 . 에드워드 데일리(사건 당시 기관총사수) 인터뷰 17:08- 미군에 의해 피난길에 오른 주민들 - 미군을 따른 피난길에서의 사살에 대한 생존자들의 증언 21:31- 미군은 왜 자신들이 인도하던 피난민 대열을 공격했는가 - 존 C. 리핑컷(당시 미군 소대장) 인터뷰 - 피난민으로 위장한 인민군의 존재 여부 . 조지 D. 프리스, 제임스 컨스 인터뷰 - 북한군의 탱크에 의한 공격의 진위 여부 . 제임스 컨스, 허먼 패터슨, 에드워드 데일리, 정창인 (전 육사교수/군사평론가) 31:35- 노근리에 배치된, 전투경험이 전무했던 부대 32:27- 철로 위 폭격을 피해 쌍굴다리로 모여든 사람들을 향한 학살 - 굴다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 . 에드워드 데일리 인터뷰 - 작전명령에 의한 굴다리 포위 . 에드워드 데일리, 허먼 패터슨 인터뷰 - 굴 안에서 먼저 미군을 향한 사격이 시작되었나 . 에드워드 데일리, 허먼 패터슨, 제임스 컨스, 생존자들의 증언 - 피난민 사이에 휩쓸려 쌍굴다리에 들어갔던 미군 델로스 플린트 45:54- 노근리 양민 학살은 어떤 근거에 의해서 발포 명령이 내려졌는가 - 에드워드 데일리, 허버트 B. 하이어(당시 7연대 2대대장) 인터뷰 - 전선에 시간적 여유가 있었음에도 피난민에 대한 사살 명령 하달 . 에드워드 데일리, 정창인 인터뷰 - 피난민을 적대시하는 명령문 51:04-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그 날의 진실 52:22- 다음회 예고 53:10- 후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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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1999, 8회 | 19991107 | 48분 | 상세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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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핵개발> 내용
핵개발 문제를 언급한 최초의 공식문서는 지난 98년 비밀해제된 미국측 의 기밀 전문이다. 미국대사관과 본국 사이에 오간 전문의 내용을 보면, 70년대 중반경 한국정부가 핵무기 개발을 위한 연구를 진행 중이었으며 미국은 동북아 정세를 고려해서 이를 적극적으로 만류했다는 것이다. 69 년 7월 닉슨 독트린 이후 박정희 정부는 자주국방론을 역설하며 무기 국 산화에 박차를 가한다. 일부에서는 이 때 이미 핵무기 개발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70년대 한국의 핵개발 연구는 어느 수준까지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는 무엇인가? 그것은 원자력에너지 공급이라는 평화 적 이용을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원폭개발이라는 군사적 목적을 위한 것이었을까? 당시 이 사업에 참여했던 과학자와 관료들의 증언을 통해 핵개발 사업의 진상을 알아본다. 더불어 박정희 시대의 핵 연구사업을 둘러싸고 당시 국 제사회의 시각은 어떤 것이었으며, 미국의 인식처럼 당시 남한 핵개발이 남북관계나 동북아 안정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던 것인지도 짚어봄으 로써 핵문제를 대하는 우리의 관점을 재정립하는 계기로 삼는다. 00:00- 타이틀 00:13- 프롤로그 - 박정희의 죽음은 핵개발로 빚어진 미국과의 갈등때문이었을까 - 이해동(목사, 당시 재야운동), 김진명('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저자) 02:04- 전CM 05:38- 핵개발 진위에 대한 서로 다른 주장들 - 1972.1 박정희 전 대통령 연두 기자회견 - 1995년 국회 국방과학위원회 국정감사, 강창성(의원, 전 보안 사령관) - 故 선우련(전 청와대 공보비서관), 박원구(당시 원자력연구소 핵연료개발 실장), 이경서(당시 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 07:47- 무기개발위원회에서 미사일 개발 계획 착수 - 1978년 프레이저 보고서 - 유재흥(전 국방장관), 이경서 인터뷰 - 70년대 TV 홍보프로그램 - 군사력과 공업화 수준에서 남한을 앞선 북한 - 닉슨 괌독트린 발표, 주한미군 2만명 철수 - 핵 재처리기술 도입을 위한 프랑스 방문 . 이병휘(과기원 명예교수, 당시 과기처 원자력 국장), 김철 (아주대 교수, 당시 원자력연구소 연구실장) 인터뷰 - NRX원자로 도입을 위한 캐나다 방문 . 주재양(당시 원자력연구소 부소장) 인터뷰 17:02- 미국에 알려진 한국의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 계획 - 폴 클리브랜드(당시 주한미대사관 정치담당 참사관), 돈 오보도퍼(당시 워싱턴포스트 기자) 인터뷰 - 인도의 핵실험 성공 . 김광모(당시 경제2수석실 비서관) 인터뷰 - 재처리기술 도입의 좌절과 미국의 압력 . 이회일(당시 주불 경제담당 공사), 박동진(외교협회장, 당시 외무부장관), 박원구 인터뷰 - 한국에 대한 핵사찰 강화 . 김철, 주재양 인터뷰 25:44- 왜 핵무기 개발 의지를 외신에 흘리고 실제보다 과장되게 과시했는가 - 이병휘, 김철, 이경서 인터뷰 - 핵무기라는 배수진을 치고 미국과 흥정을 벌인 성과와 미국과의 관계 . 신이치 오가와(일본 방위연구소), 이삼성(가톨릭대 미국학과 교수), 이회일 인터뷰 - 계속되는 방위산업과 핵개발사업 . 한국중공업 창원기계공업단지 . 월성원자력발전소 . 박원구, 김철, 김광모 인터뷰 - 당시의 핵개발 능력의 정도 . 이경서 인터뷰 36:15- 김진명의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로 다시 떠오른 핵개발 논란 - 이휘소의 죽음과 핵개발의 관련성 여부 . 김광모 인터뷰 - 박정희의 죽음과 미국의 관련 여부 . 김진명, 이학봉(당시 합수부 수사부국장), 강신옥(당시 김재규측 변호사), 박동진, 이호재(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인터뷰 40:35- 80년대 이후 다양해진 핵에 대한 논의 41:33- 94년 북한 핵 사찰 - 조갑제(<월간조선> 편집장), 이삼성 인터뷰 43:11- 위태로운 도박이었던 박정희의 핵개발 계획 43:52- 우리에게 핵은 필요한 것인가 - 이경서 인터뷰 46:09- 다음회 예고 46:48- 후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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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1999, 7회 | 19991031 | 51분 | 상세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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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선과 코리아게이트> 내용
1976년 10월 24일 워싱턴포스트지 1면 톱에 실린 기사는 워싱턴 정가의 정치윤리를 다시 문제삼게 되는 사건의 발단이었다. 미국 의회를 상대로 한국정부의 대리인이 수백만달러를 뇌물로 주는 등 불법로비 행위를 했으 며 이에 관련된 의원들만 해도 수십명에 이른다는 언론의 보도는 전 미국 을 경악케했다. 제2의 워터게이트의 악몽을 우려한 미국측은 의회와 법무 부 등 5개 기관이 사건 조사에 착수하였고, 이후 약 2년동안 한국의 불법 로비스캔들은 미국 언론에 가장 자주 등장한 주제 중의 하나가 되었다. 사건의 주역인 박동선과 김동조 전 주미대사의 증언문제로 한미 양국은 2년여에 걸친 지난한 협상과정에서 심각한 관계의 악화를 경험해야만 했 다. 20년이 지난 지금, 사건의 주역인 박동선이 활동의 주무대였던 조지타운 클럽과 당시의 로비활동을 공개하며 입을 연다. 과연 '코리아게이트'의 실체와 진상은 무엇이며, 한미관계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지, 또 우리는 그 역사속에서 무엇을 배워야할 것인지를, 불행했던 한미관계사의 대표적 인 한 사건을 통해서 알아본다. 00:00- 타이틀 00:14- 프롤로그 - 조지타운 클럽, 박동선의 초상화 제막식 01:53- 전CM 05:26- 미국 국회의사당 법사위원회 회의실, 그리고 코리아 게이트 06:55- 76년 워싱턴포스트의 특종기사로 시작된 코리아 게이트 - S. 암스트롱(<워싱턴포스트> 당시 취재기자), 08:14- 워싱턴 사교계의 유명인사였던 박동선 - 박동선(당시 코리아게이트 주역/현 파킹턴사 사장), 김영희 (중앙일보 상무, 당시 워싱턴 특파원) 인터뷰 - 박동선의 사교클럽, 조지타운 클럽 . S. 암스트롱 인터뷰 12:28- 박동선, 미국과 한국을 떠나 런던에 칩거 - 박동진(당시 외무부 장관), 박동선 인터뷰 15:12- 한국내의 반응 - 미국의 청와대 도청 비난 관제데모(수도여고) 16:05- 코리아게이트에 대한 조사 - 77.8 칩거에서 돌아와 처음으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 . 미국 법무성 박동선 비밀기소 - 박동선을 보내라는 미국의 요구와 한국 정부의 거부 - 외교적 타협으로 해결의 실마리 마련 . 벤자민 시빌레티(변호사, 당시 법무차관) 인터뷰 - 78.1 한미 양측 검사 동석한 첫 조사 . 박동선의 로비 활동의 불법 여부에 대한 심문 . 박동선, 벤자민 시빌레티 인터뷰 - 하원의 비밀증언과 하원 윤리위원회의 공개 질문 . 일명 명단(출신지, 소속위원회, 정치자금 액수 등 기록) 등의 증거 제시 . 박동선 인터뷰 - 69년 3월 박동선의 주선으로 미 하원의원 한국 방문 .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미의원들의편지(박동선을 칭찬하거나 추천하는 내용) . 박동선 인터뷰 25:45- 쌀과 관련된 양국의 이해관계 . 에드윈 에드워드(당시 하원의원, 루이지애나 4선 주지사), 박동선, 김영희 인터뷰 - 한국 정부가 대미 로비를 생각했던 이유 . 닉슨 독트린과 관련한 주한미군 철수 문제 . 유신체제 선포 . 박동진, 베이커(당시 프레이저위원회 조사관) 인터뷰 - 박동선이 의회 로비의 주역이 된 이유 . 김영희, 박동선 인터뷰 - 박동선은 한국 중앙정보부의 로비스트였나 . 이재현(전 주미 공보관장, 73년 망명, 현재 웨스턴 일리노이 대학 교수), 박동선, S. 암스트롱, 베이커 인터뷰 . 76년도 대미 공작 방안 42:29- 사건의 종결 - 김동조(전 주미 한국대사), 베이커, 시빌레티, 클라이스틴 (전 주한 미대사), 이정희(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인터뷰 46:43- 코리아 게이트 이후의 박동선 - 박동선 인터뷰 47:48- 코리아 게이트, 그 이후의 한미관계 48:39- 다음회 예고 49:27- 후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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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1999, 6회 | 19991024 | 46분 | 상세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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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죽음들- 인혁당 사건> 내용
유신시대에 있었던 여러 의혹사건 중에는 현재까지 그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사건들이 있다. 그런 사건들 중의 하나가 바로 인혁당 사건이다. 당 시 인혁당 사건은 고문과 공판기록 변조 등으로 조작된 사건이라는 강한 의혹을 받고 있었지만 유신정권의 강한 억압 속에서 인혁당 관련자들은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서도원, 도예종, 우 홍선, 하재완, 김용원, 송상진, 여정남, 이수병)은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 지고 그 유가족들은 간첩의 가족이라는 멍에를 안고 사회의 냉대를 받으 며 고통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당시 피해자 가족과 사건 관계자들의 생생한 증언과 당시 사건 관련 정 부관계자들의 인터뷰 및 다각도의 사실확인 작업을 통해 인혁당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과거 어두웠던 정치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00:00- 타이틀 00:14- 프롤로그 - 이용택(사건당시 중앙정보부 국장), 한승헌(사건당시 인혁당계 변론) 인터뷰 02:16- 전CM 05:48- 추모할 수 없는 이름 인혁당 07:11- 1차 인혁당 사건 발표 - 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 - 인혁당 사건의 공소 기각 . 장원찬(사건 당시 공안부 검사) 09:53- 10년 뒤 인혁당재건위(2차 인혁당) 사건 발표 - 강창덕(인혁당재건위 관련 무기징역 선고) 인터뷰 - 유신철폐운동 - 긴급조치4호와 민청학련 사건 . 강신옥(민청학련계 변론) 인터뷰 - 민청학련의 배후라는 인혁당 관련 주요 인물들 - 이승만 정권부터 이어지던 혁신계였던 인혁당 주요 인물들 . 임구호(사건당시 징역 15년 선고) 16:30- 파행적인 수사와 재판 - 故 하재완의 공소장 - 강창덕, 나경일(사건당시 무기징역 선고), 신동숙(故 도예종의 부인) 인터뷰 - 변조된 공판기록 . 임인영(인혁당재건위 관련자 전창일의 부인) - 인혁당 사건 최종 판결 - 상고 기각 후 20시간도 되지 않아 집행된 사형 . 영국 BBC 자료 . 이영교(故 하재완의 부인), 전창일(사건당시 무기징역 선고) 한승헌, 이용택 인터뷰 24:13- 사형집행 후 시신탈취 - 김진생(故 송상진의 부인), 문정현(사건당시 시신탈취 저지) - 시신에 남아있던 고문의 흔적 . 이용택, 김정강(63년 서울대 이념서클 불꽃회 조직, 도예종, 이수병 등과 친분) 인터뷰 27:06- 인혁당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 '인혁당진상규명' 시민토론회(99.10.15) - 사형 선고에 결정적 증거였던 하재완의 노트 . 이용택, 이영교, 강신옥, 임구호 인터뷰 - 2차 인혁당 관련자들과 민청학련의 관계 . 이용택, 유인태(민청학련사건으로 사형선고), 이철(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 하야가와 요시하루(민청학련 배후혐의 징역 20년 선고), 다치가와 마사키(민청학련 배후혐의 징역20년 선고) 인터뷰 36:56- 남겨진 사람들 - 송철환(故 송상진의 아들), 김진생(故 송상진의 부인), 신동숙, 강신옥, 임구호 41:16- 진상을 밝히고자 하는 유족들의 농성 43:04- 다음회 예고 43:04- 후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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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1999, 5회 | 19991017 | 57분 | 상세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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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14연대 반란> 내용
1948년 남한과 북한이 각각 단독선거를 치르고 단독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에 남한에서는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시위가 연일 계속되었는데 최남단 여수는 조용하였다. 하지만 제주 4.3사태의 진압을 위해 파병을 기다리던 14연대는 지창수를 중심으로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을 외치 며 반란을 일으키고 여수를 손쉽게 장악한 후 순천까지 진출한다. 이러한 기미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정부와 미군정은 황급히 대책을 수립하고 반란군을 공격 1948년 10월 22일 순천에 이어 26일 여수까지 탈환함으로 써 진압에 성공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실상 반란을 일으킨 지창수 등 주동자는 모두 지리산으로 도망간 후였으며 여수에는 민간인들만 남아있 었음에도 불구 무차별적인 학살이 벌어졌으며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 통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한편 좌익사상을 가진 군인들의 반란을 겪은 정부는 사실상 군 내부 좌익을 도태시키기 위해 숙군사업을 펼치게 되고 14연대 반란 진압의 일등공신 최남근 중령을 비롯한 많은 무고한 사람들 까지 사형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남로당 군사총책이었던 박정희는 남로 당의 조직도를 넘겨주는 대가로 숙군과정에서 살아남게 된다. 00:00- 타이틀 00:16- 프롤로그 - 제주 4.3사건(1948.4.3) - 단독선거 반대시위(1948.2.7) - 김구 북한 방문(1948.3.8) - 남한 단독 선거(1948.5.10) - 대한민국 정부수립(1948.8.15)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1948.9.9) - 여수 주둔 국군 제14연대 반란(1948.10.19) 02:04- 전CM 05:51- 진압군의 여수 상륙작전, 여수 14연대 반란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 - 당시 순천농업학교 교사 김관수, 당시 여수 중학교 4학년 이중근, 당시 구례 대한청년단원 김대홍, 당시 진압군에 의해 총상 장양엽 인터뷰 06:50- 14연대 반란의 시작 - 단독정부 반대시위로 시끄러웠던 타지역과는 달리 조용했던 여수 - 반란의 시작, 순식간에 여수시내를 장악한 반란군 . 당시 동광신문에 쓰인 반란 기사(1948.10.21) . 당시 여수군청 서기 김계유, 당시 여수중학교 4학년 이중근, 당시 경찰 배병태 인터뷰 - 14연대 반란 시작 과정 . 지창수 연설문 요지: 제주 출동을 반대한다, 반동 경찰 타 도하자, 인민군이 남하 중이다,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 립하자 . 당시 14연대 위생벼여 곽상국, 당시 14연대 일등병 임태황 인터뷰 - 제주 파병을 극히 꺼렸던 14연대, 여수를 장악한 14연대 - 반란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정부와 미군정 . 백선엽 당시 육군정보국장(당시 중령, 대장 예편) 인터뷰 14:52-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정부를 세우려 했던 14연대 - 여수 장악과 함께 인민대회를 연 반란군 . 여수시 연등동 김순철, 당시 여성동맹원 정기순 인터뷰 - 인민위원회의 설치 및 6개항 발표 . 인민위원회가 여수행정기구 접수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대한 수호와 충성 맹세 . 대한민국 분쇄 . 남한의 모든 법령은 무효 .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소탕 .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 실시 - 여수 시민들에게 식량을 배급하기 시작한 반란군 . 성균관대 역사학과 서중석 교수 인터뷰 19:08- 반란의 전개와 확대, 특징 - 반란군의 순천 진격과 장악 . 당시 순천 열차사무소 차장 김정효, 당시 14연대원 정두일, 당시 14연대 일등병 임태황, 당시 순천농업학교 영어교사 김관수, 당시 순천 대한청년단장 황우수 인터뷰 - 14연대 반란군 진로 . 순천 장악 후 광양, 남원, 보성으로 진격 - 반란의 배후에 대한 의문 . 당시 계엄령 보도 내용(자유신문, 1948.10.27) . 반란사건 배후 극우극좌 합작설에 대한 보도 내용(자유신문, 1948.10.22) . 김구의 반박 담화 . 공산분자의 주동이라는 보도 내용(동광신문, 1948.10.29) . 남로당과 북한 괴뢰의 계획적인 반란이라는 보도 내용(동광 신문, 1948.10.29) . 당시 육군본부 첩보과장 김점곤 인터뷰(남로당 중앙당이 배 후라면 최남단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킬 이유가 없음, 수도권 에서 일으켰을 것임) - 반란의 이유와 목적 . 전 14연대 정보부 김영만, 국사편찬위원회 김득중 연구원, 시카고대 역사과 브루스 커밍스 교수 인터뷰 29:47- 14연대 반란의 진압, 무차별적인 진압과 엄청난 민간인 피해 - 진압계획 수립, 진압군 이동 . 4F 작전: 발견하고(Finding), 차단하고(Fixing), 공격하여 (Fighting), 섬멸한다(Finishing) . 당시 육군정보국장 백선엽 인터뷰 - 순천 공격 및 탈환, 수많은 민간피해자의 발생 . 1948년 10월 22일 오후 3시 순천 공격 개시 . 당시 순천 임촌리 이장 정성규, 순천시 서면동 윤재현, 당시 현장취재원 전 호남신문 사진기자 이경모 인터뷰 - 여수 공격 및 탈환 . 1948년 10월 23일 오전 9시 40분 여수 상륙작전 개시 . 당시 인구부 전투 목격 김순철, 당시 여수중학교 3학년 전 창남, 당시 주력부대인 12연대 부연대장 백인엽 인터뷰 . 진압군 여수 진입(1948.10.26) - 이미 주동자들은 빠져나간 상황에서의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 . 군복입은 사람을 거의 볼 수 없었다는 미 군사고문단 보고서 . 구 소련 중앙기록 영화 사진보관소에 있는 14연대 반란 진압 에 대한 필름 . 이승만 담화문: 남녀 아동까지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를 제거하라. 전 민중이 절대 복종해서 이런 비행이 다시는 없 도록 하라. . 진압군이 쏜 총에 맞은 당시 16세 장양엽, 당시 여수군청 서 기 김계유, 당시 12연대 부연대장 백인엽, 당시 제3함정대 사령관 남상휘, 당시 구례 대한청년단원 김대홍, 당시 희생 자 유가족 대표 박찬근, 당시 여수경찰서 특무대장 배학래 인터뷰 . 여순사건 희생자: 사망자 최소 2600여명, 행불자 최소 4300 여명 44:59- 군 내부 좌익을 도태시키기 위한 숙군사업과 박정희 - 조금의 의심이라도 있으면 색출하여 무차별적으로 사형했던 숙군사업 . 당시 육군본부 첩보과장 김점곤, 당시 군법회의 재판장 김 완용 인터뷰 . 미 군사고문단원으로부터 입수한 필름 - 숙군과정에서 숨진 최남근 중령, 가까스로 살아남은 박정희 . 당시 군법회의 재판장 김완용, 당시 박정희 심문한 김점곤, 당시 육군정보국장 백선엽, 당시 미 군사고문단 대위 고 짐 하우스만 인터뷰 51:06- 유해 발굴 등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 - 1999년 9월 14일 여수 호명동 암매장지 유골 발굴 - 성균관대 역사학과 서중석 교수, 시카고대 역사과 브루스 커밍 스 교수 인터뷰 - 발굴 중간 집계: 두개골 5개 포함 유골 40여점 발굴 55:02-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인혁당 잊혀진 죽음들> 예고 55:45- 후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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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1999, 4회 | 19991010 | 46분 | 상세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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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의 진실> 내용
세계적인 이목을 집중시키며 화려한 찬사를 불러일으켰던 6?29선언! 군 부독재의 치욕을 마감하고 이 땅에 민주화의 새 역사를 선포했던 87년 6 월의 감격은 아직 생생하다. 그러나 선언이 발표된 지 불과 2년이 채 되 지 않았던 89년 초. 5?6공 간의 갈등 속에 불거져 나온 주체논쟁을 비롯 해 군동원설과 미국의 역할들에 대한 의혹들은 1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칠 줄을 모르고 있는데…. 과연 6?29선언의 주체는 누구인가? 그들은 진정 6?29를 원한 것인가? 민주주의의 퇴보인가, 진전인가의 갈림길에 던져진 87년 6월의 정치상황 을, 아래로부터의 민주화의 열기를 대변하는 6월 항쟁과 위로부터의 민주 화를 상징하는 6?29선언, 그리고 제3의 목격자이자 또다른 주체논쟁의 당사자인 미국의 움직임 등을 통해 입체적으로 조명해봄으로써 아직 혼돈 과 의혹속에 남아 있는 우리 민주주의 역사의 한 매듭을 풀어나간다. 00:00- 타이틀 00:26- 프롤로그 - 계속되고 있는 6.29선언에 대한 논란 . 김용갑(87년 청와대 민정수석), 박철언(87년 노태우대표 특별보좌관) 인터뷰 - 6.19 군 동원령의 실체 . 제임스 릴리(87년 주한미대사), 이종률(87년 청와대 공보수석), 안병호(87년 육본 작전처장) 인터뷰 03:23- 6.29 선언을 둘러싼 추측과 의문 - 6.29선언 의혹에 대한 노태우 전대통령의 증언 . 월간조선 99년 5월호 '노태우 육성증언' . 박철언 인터뷰 07:55- 6월 10일 두 개의 대회 - 오충일(87년 민주헌법 국민운동본부 상임위원장), 김용갑 인터뷰 - 6월 10일까지의 사건들 - 민정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 - 국민운동본부 주최의 국민대회(6.10대회) . 김용갑, 이종률 인터뷰 13:16- 6월 18일 엇갈리는 증언 - 6월 15일 명동성당 점거 시위대 해산, 지방시위의 격화 - 18일 직선제수용건의에 대한 상반된 주장 . 김용갑, 박철언 인터뷰 - 전국의 철야시위 19:35- 6월 19일 군출동 - 위수령 . 이종률, 안병호 인터뷰 22:33- 군출동은 왜 취소되었나 - 이종률, 오충일, 정호용, 제임스 릴리, 문재인(변호사, 부산 민변 회장) 인터뷰 - 미 의회와 행정부의 움직임 - 6월 19일 전대통령에게 전달된 레이건 친서 . 제임스 릴리, 해리 던롭(87년 미대사관 정치참사관), 이종률 인터뷰 . 친서 외에 구두로 전달한 백악관 메세지가 따로 있다는 증언 - 군출동에 반대하는 군 내부의 의견 . 정호용(87년 5월까지 내무장관 재임), 안병호, 제임스 릴리 인터뷰 33:54- 6월 24일 결렬과 합의 - 오전의 결렬과 오후의 합의 . 이종률, 박철언, 김영배 인터뷰 39:19- 6.29선언 주체 논란의 의미 - 이종률, 박철언, 김용갑, 이인영(87년 서울지역 대학생 연합의장), 조희연(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 인터뷰 44:35- 다음회 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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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1999, 3회 | 19991003 | 46분 | 상세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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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과 진보당 사건> 내용
간첩과 탁월한 정치 지도자라는 엇갈린 평가 속에 우리에게 잊혀진 이름 조봉암. 그는 조선공산당의 주도적 인물이었으나 극적으로 전향한 후, 초 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역임했으며,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는 216 만표를 획득하여 혁신정당인 진보당을 창당, 평화통일론과 사회민주주의 를 기치로 내세우며 활동했다. 그러나 1958년 '진보당 사건' 즉, 평화통 일을 내세운 진보당의 강령과 정책이 북한의 주장과 같고, 간첩 양명산을 통해 북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으며, 북한과 합작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참칭할 목적으로 국내 기밀을 제공했다는 간첩 혐의로 기소되었다. 사건 의 결과로서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은 무죄로 판결이 났으나 당은 불법화되 었고, 결국 그는 간첩죄로 사형을 당했다. 조봉암의 죽음에 대해서는 40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간첩죄로서의 당연한 결과라는 시각과, 정치적인 음모라는 상반된 주장이 맞서고 있다. 최근 공개 자료와 사건 관련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바탕으로 40년만에 조 봉암의 죽음에 얽힌 진실에 접근한다. 진보당 관련자 증언과 최근 공개된 국무회의록, 당시 수사자의 양심선언, 이중 간첩 양명산, 조호정 여사의 고백, 명예회복 운동의 현황과 재평가 등을 알아본다. 00:00- 타이틀 00:13- 프롤로그 - 평양 인근의 애국 열사릉에 모셔져 있는 조봉암의 가묘 - 논란이 계속되는 그의 죽음 02:05- 조봉암선생 서거 40주기 추도식 - 이강훈(광복회 고문), 박문철(전 진보당 경남도당 선전부장), 배한석(전 진보당 진주 선전부장) 인터뷰 03:44- 죽산 조봉암 - 김제영(소설가, 당시 농림부 장관실 근무), 송방용(헌정회 회원 2,3대 민의원, 무소속), 권대복(당시 진보당 사회부 간사), 옥영진(당시 진보당 경남도당 간사장), 오유석 (성공회대 사회문화 연구소) 07:07- 진보당에 대한 수사와 간부들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07:43- 진보당 관계자들에 대한 공판 - 평화통일론을 비롯한 진보당의 강령이 문제가 됨 - 양명산(본명 양이섭)의 등장 - 김봉환(변호사, 당시 변호인), 이병용 인터뷰, 태륜기(변호사, 고 유병진 판사 대학선배) - 진보당은 어떤 정당이며 문제가 된 강령은 어떤 내용이었는가 . 권대복, 조민(통일연구원 연구위원), 서중석(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이병용(변호사, 당시 1심 배석판사) . 고 조봉암의 육성 - 1심 9회 공판정 . 양명산(본명 양이섭)의 등장 . 김봉환(변호사, 당시 변호인), 이병용(변호사, 당시 배석판사), 태륜기(변호사, 고 유병진 판사 대학선배) 인터뷰 - 법원난입사건 - 2심 법정(검찰의 항소) . 양명산의 1심 진술 번복 . 김봉환(변호사, 당시 변호인, 양명산도 담당), 전 특무대 고위인사 인터뷰 - 조봉산은 왜 간첩으로 몰렸는가 . 김학준(인천대 총장), 권대복 인터뷰 . 고 조봉암 육성 - 대법정 . 조국(울산대 법학과 교수) 25:39- 조봉암의 형무소 생활 - 딸 조호정의 구명운동 . 조호정(고 조봉암의 딸) 28:07- 재심청구 기각, 다음날 사형 집행 - 김춘봉(변호사, 당시 변호인), 조국, 조호정 인터뷰 - 조봉암 죽음과 장례식 보도 통제 31:35- 계속되고 있는 조봉암 복권 운동 - 당시 수사 고위 관계자, 윤길중( 전 진보당 간사장, 전 국회부의장), 조호정 인터뷰 - 치안국 고문 홍모씨가 전해준 정보로 당시 법정에서 증언한 내용 34:03- 누가 조봉암을 죽음으로 몰고 갔는가 - 미국국립문서보관서에 보관되어 있는 조봉암, 진보당 사건 관련 기록 . 프레드 토마스(당시 주한 미대사관 조봉암담당 정치참사관) - 국무회의 비망록 . 작성자 고 신두영(당시 국정원 사무국장) - 사건 수사에 참여했던 한승격의 증언 . 한승격(당시 시경찰청 수사자문위원) 41:47- 변화한 사회, 조봉암에 대한 새로운 평가들 - 조봉암선생 탄생 100주년 서거 4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움 및 전집 출판 기념회 - 김학준, 조국 인터뷰 - 아버지 회고록을 집필중인 딸 조호정 45:30- 다음회 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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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1999, 2회 | 19990919 | 54분 | 상세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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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동백림 사건> 내용
박정희 정권이 6.8 부정선거 등으로 민심을 잃고 곤혹스러운 시기였던 1967년 7월. 교수, 유학생, 음악가, 화가 등 200여명이 검거되는 대규모 간첩단 사건, 이른바 '동백림거점 공작단 사건'이 터졌다. 불법납치로 인 한 국제적 망신이라는 불명예와 함께 우리 나라 최대의 공안조작사건으로 불리고 있는 '동백림사건'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대다수의 국민들 기 억속에서 아직도 반한(反韓)인사로 인식되어온 음악가 윤이상에 대한 명 예회복 논쟁이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대두되고, 당시 유학생으로 연루된 한 교수는 '중앙정보부가 만든 코미디'였다고 단정하는 동백림사건! 이 사건을 통해 남북대립을 이용한 정권유지에 대한 비판과 통일을 위한 활동을 바라보는 시각의 시대적 변화, 그리고 국가보안법에 대한 재해석 을 통해 북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등에 대해 살펴 본다. 00:00- 타이틀 00:25- 프롤로그 - 40여년만에 처음으로 아버지의 고향을 찾아 통영여자고등학교 방문한 윤이상의 딸 윤정 02:54- 전CM 06:57- 통영에서 열린 윤이상 음악회 - 부인 이수자가 돌아올 수 없는 이유 10:11- 동백림 사건은 조작인가 - 이수자, 김학준(인천대총장, 당시 조선일보 기자), 김택환 (교원대교수, 당시 독일 뮌헨대 박사과정), 이용택 (경주관광개발공사 사장,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과장) 인터뷰 - 1967년 동백림사건 1차 발표 - 박성옥이 얘기하는 동백림 사건의 동기 - 조선일보 이기양 특파원의 실종 사건 . 이용택 인터뷰 - 임석진과의 인터뷰 . 당시 프랑스 유학생, 김택환 인터뷰, 윤이상(과거 영상) - 화가 이응로 미망인 박인경 여사와의 인터뷰 - 혐의대상자들에 대한 체포작전 . 박성옥, 김택환 인터뷰 - 중정의 과잉수사 . 김택환, 이용택, 이수자, 목순옥(고 천상병 미망인) 인터뷰 - 동백림사건 2차 발표 . 이종률(통일시대연구소장, 당시 민족주의비교연구회 회장), 박범진(국회의원, 당시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총무) 인터뷰 . 민비위를 동백림 사건에 연루시킴 - 체포과정의 위법성 논란 . 김영준(변호사, 당시 1심 담당판사), 신창동(변호사, 당시 임석훈 담당변호사), 한승헌(감사원장, 당시 이응로, 천상병 담당변호사) 인터뷰 - 이들의 행위가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가 . 김영준, 한승헌, 이용택, 김택환 인터뷰 - 형기 이전에 모두 석방된 동백림 관련자들 . 윤이상 법정진술(육성 녹음) . 이용택, 한승헌, 김영준 인터뷰 45:44- 사건 이후 이응로 부부 프랑스 생활 모습 47:31- 사건 이후의 윤이상 부부 - 이수자, 이용택 인터뷰 52:24- 다음회 예고 53:06- 후CM |
프로그램 구입안내
02-789-0123- 평일:09:00~18:00
- 점심:12:00~13:00
- 토요일, 공휴일 휴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