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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방영회 | 방영일 | 방영시간 | 상세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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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1, 13회 | 20010803 | 50분 | 상세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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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사냥- 도시산업선교회> 내용
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과 함께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단 체가 있었다. 해방신학을 바탕으로 사회 전복을 꿈꿨던 좌익 용공세력 도 시산업선교회. 도시산업선교회가 침투한 기업은 모두 도산한다는 누명을 쓴 채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정부와 언론에 의해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살아야 했던 7~80년대의 여공들은 지금도 그 누명의 고통을 안고 살 고 있다. 당시 언론은 방송을 통하여 갖가지 특집물과 기획물을 제작하였고, 신문 을 통하여 '도산 시리즈'를 연재했었다. 도산의 마녀사냥은 그렇게 언론 을 통한 사회로부터의 고립화에 성공을 거둔다. 당시 KBS, MBC의 데스크 들과 도산에 대한 기사를 썼던 취재기자들이 입을 열었다. 언론이 도산의 마녀사냥에 나서야 했던 이유와 그 과정을 파헤쳐 본다. 00:00- 타이틀 00:14- 프롤로그 01:04- 전CM 03:23- 도산에 대한 언론의 보도 - 황선금(당시 노동자), 정성순(당시 '원풍모방' 조합장) 정정근, 김윤수(당시 조선일보 기자), 이윤성(당시 KBS 앵커) 인터뷰 - MBC, KBS의 도산 실체를 알리기 위한 특집 보도들 08:01- 콘트롤데이터사의 폐업 - 당시 '콘트롤데이터사' 노조위원장 한명희 인터뷰 - 콘트롤데이터사의 폐업 이유 . 한명희 인터뷰 - 정부가 노동자 탄압을 위해 이용했는가 . 한명희 인터뷰 - 전혀 보도되지 않은 노동자들의 입장 11:34- 도시산업선교회(약칭 '도산) - 이원홍(1980~85년 KBS 사장), 박준양(당시 대검 공안부장), 인명진(당시 '도시산업선교회' 목사), 조지송(당시 '도시산업선교회' 목사), 조화순(당시 '도시산업선교회' 목사) 인터뷰 - 당시 노동자들의 생활 - 신순애(당시 노동자), 박해숙(당시 노동자), 조지송, 조화순 인터뷰 17:07- 노동 현실 개선하고자 한 도시산업선교회 . 자신들이 처한 현실에 눈뜨게 된 노동자들 . 조화순, 조지송 인터뷰 - 스스로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 위한 투쟁 시작 - 70년대 민주노조 운동의 출발 - 인명진, 조지송 인터뷰 19:06- 국내 언론에 보도되지 않는 사건들 - 박태연(당시 'YH무역' 노동자), 권순갑(당시 'YH무역' 노조위원장), 인명진 인터뷰 - 동일방직 "똥물 사건" . 이총각(당시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인터뷰 - 동일방직 "나체 시위" - 이태호(당시 취재기자) 인터뷰 - 오히려 외국 언론에서 주목하는 한국의 노동 현실 21:41- 강화되는 언론통제 - 하순봉(당시 MBC 정치부장), 이태호 인터뷰 23:19- 처음으로 언론에 보도된 'YH사건' - YH노조 신민당사 농성(1979년)과 경찰의 강제 진압 - 최순영(당시 'YH무역' 노조위원장), 이태호 인터뷰 24:50- 경찰발표에 의해 좌익세력의 투쟁으로 탈바꿈된 'YH사건' - 박준양(당시 대검 공안부장) 25:49- 처음부터 도산의 용공성을 입증하려는 의도로 시작된 조사 - 박준양 인터뷰 - '도산'이 침투하면 반드시 회사가 망한다? - 박준양, 조화순, 박정규(당시 공안검사) 인터뷰 - 도산 여공들의 노사분규 방법 . 박준양 인터뷰 - 사상유례없는 성경재판 . 박정규, 인명진 인터뷰 31:15- 통치의 효과적인 수단으로서의 언론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전두환정권 31:40- 실제 벌어진 일과 달랐던 "원풍모방" 사건 방송 내용 - 양승화(당시 "원풍모방" 노동자), 정성순(당시 "원풍모방" 조합장) 인터뷰 - 회사와 정부의 각본 하에 언론이 함께 하기 시작 . 양승화 인터뷰 - 도산에 대한 왜곡된 내용 방송 . 사이비종교집단처럼 비춰지는 촛불의식 . 사람이 다친 기록이 없는 흉기에 대한 왜곡된 설명 . 이윤밖에 모르는 비양심적인 기업주들을 풍자한 노래 35:19- 의도적으로 붉은 색으로 덧입힌 노사분규 현장에 대한 TV 화면 - 황근(매체비명 우리 스스로' 기획위원), 주동황(방송개혁위원회 위원) 인터뷰 36:29- 농성하는 딸을 데려가는 가족들의 모습 방송 - 정부와 회사에 의해 진행된 작전 - 박순희(당시 "원풍모방" 노동자), 정정근(당시 여공 오빠), 정영래(당시 "원풍모방" 노동자) 인터뷰 38:38- 권력의 소리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언론 - 하순봉, 이원홍, 박철언(당시 대통령 정무비서), 최병렬 (1980~85년 조선일보 편집국장), 김윤수 인터뷰 - 신군부 계엄하에서 언론에 대한 사전 검열 . 김윤수, 이원홍 인터뷰 41:48- 정권과 이해가 맞지 않으면 사회 정화라는 이유로 격리하던 시대 42:18- 원풍노조의 최후에 대해 방송되지 못한 내용 43:27- 여공들의 노조를 와해시키기 위한 정부의 폭력 - 최순영, 박해숙, 김숙자(당시 노동자), 정영래 인터뷰 45:24-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사람들 - 조지성 인터뷰 48:04- 다음회 예고 48:39- 후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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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1, 12회 | 20010727 | 52분 | 상세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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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을 제거하라- 에버레디 플랜> 내용
미국의 지지를 업고 대통령에 오른 이승만도 미국의 국익에 저해 될 때 는 제거의 대상이 될 수 있다. 1952년 부산 정치파동으로 불거진 미국의 이승만 제거계획은 '이승만 감금, 유엔 군정실시'등의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1953년 '에버레디 플랜'으로 나타났다. 이승만의 휴전반대와 반공포 로 석방으로 실행일보직전까지 갔던 이 계획은 비록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후일, 미국의 이해에 반하는 이승만의 행동이 나올 때마다 표면으로 드러 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의 하야로 결론지어진 4. 19 혁명 역시 이러한 과정의 하나였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게다가 박정희의 주도로 발발한 1961년 군사쿠데타의 위기 속에 미국이 또 다른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새로운 주장도 제기 되었다. 미국의 제3세계 통치방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이 계획의 구체적인 실상을 파헤친 다. 00:00- 타이틀 00:41- 전CM 03:28- 프롤로그 - 4.19와 이승만의 망명,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미국의 '에버레디 플랜' 04:35- 군부의 이승만 암살계획 - 선우종원(장면 비서) 인터뷰 06:42- 이승만의 정치적 위기 상태 07:27- 부산에 계엄령 - 야당 탄압 - 곽태진(2대 국회의원) 인터뷰 08:26- 대구 육군본부의 반응 - 정래혁(참모총장 비서실장) 인터뷰 - 육본의 군사작전 미국에 승인 요청 . 찰스 토마스(미대사관 정무과), 정래혁 인터뷰 - 미 합참의 이승만 감금, 유엔 군정 실시 계획 . 찰스 토마스 인터뷰 12:46- 재임하게 된 이승만 - 홍석률 박사 인터뷰 13:46- 휴전에 대한 미국과 이승만의 의견차이 - 찰스 토마스, 존 테일러(테일러 사령관의 아들), 홍석률 인터뷰 - 에버레디 플랜 . 북진을 주장한 이승만과 마찰을 빚은 미국의 이승만 제거 계획 -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 홍석률 인터뷰 19:21- 이승만 대체 인물을 찾지 못해 실행되지 못하는 에버레디 플랜 - 브루스 커밍스(시카고 대학) 인터뷰 20:13- 이승만과 미국 사이에서의 한국군 - 로이 하버캠프(미대사관 정무과), 다니엘 오다너휴(미대사관 정무과), 홍석률 인터뷰 22:33- 붕괴 위기에 처한 한국 경제 구제를 위해 일본과의 수교 권유 - 윌리엄 왓츠(미대사관 정무과), 제임스 클렘스틴(국무부 한국과) 인터뷰 25:47- 1960년 대선 - 부정선거와 김주열의 죽음 - 하워드 쉐이퍼, 로버트 리치(미대사관 정무과) 27:40- 김주열의 죽음으로 촉발된 4.19 - 미대사관의 움직임 . 제임스 클렘스틴 인터뷰 - 4.19 . 윌리엄 왓츠, 로버트 리치, 토마스 슈스미스(미대사관 정무과) 인터뷰 - 4.19에 대한 미국의 대처 . 윌리엄 왓츠, 하워드 쉐이퍼, 제임스 클렘스틴 인터뷰 - 정국의 열쇠를 쥔 군 . 로버트 리치, 정승화(당시 1군사령관 부관), 윌리엄 왓츠 36:24- 이승만의 하야 - 유주봉(4.19 학생 대표), 윌리엄 왓츠, 토마스 슈스미스 인터뷰 39:11- 다시 수면위로 떠오른 에버레디 플랜 - 한상국(매그루더 부관) 인터뷰 41:16- 5.16 군사 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침묵 - 다니엘 오다너휴 인터뷰 - 미국이 원하는 강력한 지도자가 되지 못했던 장면 . 하워드 쉐이퍼, 제임스 클렘스틴, 다니엘 오다너휴, 로버트 리치 인터뷰 - 미국이 찾은 새로운 대안, 박정희 . 61.11.17 박정희의 내셔널프레스클럽 연설 . 제임스 클레스틴, 토마스 슈스미스 인터뷰 47:44- 에버레디 플랜과 박정희 49:03- 다음회 예고 49:36- 후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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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1, 11회 | 20010720 | 52분 | 상세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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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 타이틀
00:16- 프롤로그 04:36- 평화의 댐 건립배경 09:20- 200억톤 물폭탄, 과연 가능한가 - 안수한(당시 서울대 토목공학과 교수), 김의홍(당시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연구원) 교수 인터뷰 13:09- 서울 50미터 침수도, 어떻게 나왔나 - 엄광용(당시 한전 전원계획처 과장), 한수남(당시 건설부 댐 계획과 계장) 인터뷰 18:02- 금강산댐, 과연 수공용인가 - 이기백(당시 국방부장관), 이학봉(당시 안기부 제2차장) 인터뷰 - 전력생산을 위한 금강산 발전소 착공 23:02- 평화의 댐 합리화를 위한 미국과의 거래 - 박수길(당시 외무부 1차관보) 25:13- 보이지 않는 손 - 한수남, 김여택(금강산댐 대책본부 자문), 최영박(당시 토목 학회장), 이학봉(당시 안기부 제2차장) 인터뷰 - 대책본부 조직도 33:22- 평화의 댐, 왜 작아졌나 - 북한에서 '금강산발전소 백서'를 발간, 정부의 발표와 차이가 나게 됨. - 이희승(평화의 댐 설계) 35:30- 정부는 북한의 이론을 반박하고, 평화의 댐을 착공 - 이희승(평화의댐 설계) 38:20- 무엇을 위한 시나리오였나 - 전두환 전 대통령 국회 증언 - 이학봉, 김근태 의원, 정현곤(당시 건대항쟁 참여), 김재홍(당시 동아일보 해직기자), 김주언(언론 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 인터뷰 - 민주화운동에서 반공의식으로의 주의전환 43:55- 현재진행형인 남북관계의 흔적, 평화의 댐 - 이종석(세종연구소 남북한관계 연구실장) 인터뷰 - 워싱턴 포스트: 불신과 낭비의 사상 최대의 기념비적 공사 48:37- 다음회 예고 52:02- 클로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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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1, 10회 | 20010713 | 52분 | 상세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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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언론실천선언> 내용
1974년 10.24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자유언론실천선언문을 외치던 기자들 은 지금도 거리에서 26년째 그 선언문을 외치고 있다. 박정희 정권의 유 신과 긴급조치 1.2호 이후 정부의 검열, 기관원 상주, 기자 연행 등 되풀 이 된 언론탄압은 최근 한겨레 신문 광고탄압까지 현재 진행중이다. 폭압적인 유신정권의 언론탄압은 모든 광고를 해약시키는 '동아일보 백 지광고 사건'까지 이른다. 결국 언론사주는 3월 17일 폭력배를 동원해 기 자들을 강제 해산시키고, 권력에 야합한다. <동아광고사태>를 고비로 국 가가 원하는 정보를 제공하고, 국가권력에 기생하는 관제언론이 탄생한다. <동아광고 사태>를 통해 지금까지 자행되고 있는 국가권력의 언론탄압 실 체를 파헤치고, 이에 기생해 경제적 번영만을 이룬 족벌사주를 해부하고 자 한다. 00:00- 타이틀 00:15- 프롤로그 02:19- 전CM 05:07- 대통령 긴급조치를 통한 언론탄압 -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1973년)전개에 맞선 대통령 긴급조치 1호 - 긴급조치 1호 4항: 개헌논의 등 방송 보도 출판금지 - 장기표(신문명 정책연구원장), 이부영(한나라당 의원) 정연주(전 동아일보 기자) 인터뷰 10:33- 자유언론 실천선언(1974년10월 24일) - 박창래(파이낸셜뉴스 논설고문), 성유보(민언련 이사장), 장윤환(대한매일 논설고문), 홍건표(74년 당시 10.24선언 취재) 15:20- 자유언론 실천선언 운동의 전국적 확산 - 이태호(사회평론가), 정연주(한겨레 논설 주간), 함세웅 신부(당시 정의구현사제단으로 활동) 인터뷰 - 동아일보의 참다운 언론행위 18:02- 중앙정보부의 동아일보 광고중지 압력 - 김인호(당시 동아일보 광고국장), 서순일(당시 광고영업소 소장) 어준선(안국약품 회장) 인터뷰 - 98%의 광고가 취소, 백지광고가 나감 - 개인의 격려광고 쇄도 . 김인호, 이지인, 김재형, 이부영 인터뷰 - 광고탄압에 대한 정부의 책임 . 이원경(당시 문공부장관), 김한조(당시 대미로비스트) 인터뷰 - 해외에서도 계속된 언론 광고탄압 . 김운하(당시 동아일보 미주판 편집국장) 인터뷰 31:00- 미국 NBC뉴스의 동아사태 보도 32:23- 언론사주의 기구축소와 기자들의 농성 - 이동욱(당시 동아일보 주필), 이태호, 성유보, 임채정, 정연주 김학천 인터뷰 38:09- 68년 신동아 사태 - 김재홍 교수, 박창래, 김병익, 이동욱 인터뷰 - 정권의 탄업과 사주의 타협, 굴복 42:00- 일본 NHK뉴스의 동아사태 보도 43:15- 80년대 자유언론에 닥친 또한번의 좌절 - 박종만 인터뷰 - 계엄하의 언론인 강제해직(정화조치) 48:38- 다음회 예고 49:22- 후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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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1, 9회 | 20010706 | 51분 | 상세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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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분단- 재일동포> 내용
일본속의 작은 한국. 이쿠노쿠 시장도 그런 곳중의 하나다. 일본땅 한가 운데에서도 한민족의 이름과 입맛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는 이 들을 재일동포라 부른다. 그리고 현재 일본 전역에는 63만여명의 재일동 포가 살고 있다. 식민지 시대 광산이나 군수공장 등의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일본으로 강제 연행되었던 조선인들. 그들이 오늘날 재일동포의 뿌 리가 되었다. 해방이 되자 당시 230만에 이르던 조선인들 대부분이 고국 으로 귀환했지만 생계등을 이유로 그중 60여만명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던 것이다. 해방후 언 60년. 아직도 일본땅에 살고있는 그들의 후손에게 대 한민국은 과연 무엇인가. 00:00- 타이틀 00:14- 프롤로그 - 일본에 살고 있는 63만의 재일동포들에게 대한민국은 과연 무엇인가 - 이철(재일동포, 75년 간첩죄구속, 13년 복역), 박영식(82년 간첩죄구속, 6년 복역), 강종헌(76년 간첩죄구속, 13년 복역), 03:31- 전CM 06:18- 75년 간첩죄로 구속되었던 이철 - 이철 구명 자료집(<이철을 구하는 모임 전국연락회의>) - 이철 인터뷰 08:23- 간첩 - 재일 한국 양심수 동우회 - 이종수(재일동포, 82년 간첩죄구속, 6년 복역), 박영식, 강종헌 인터뷰 - 조총련계와 민단계가 섞여 살고 있는 재일동포 사회 . 김경득(재일동포, 일본 최초 한국국적 변호사) 인터뷰 - 70년대부터 대폭 늘어난 일본 관련 간첩사건 12:24- 증오 - 이종수의 인터뷰 - 한국의 공안기관에서 일하던 재일동포들 . 김병진(재일동포, 83년 보안사 연행, 공소보류) 인터뷰 . 저서 '보안사'(88년 출판, 보앙ㄴ사의 재일동포 간첩조작과정을 폭로) 17:28- 남과 북 - 해방 직후 조직되었던 민족단체 . 좌익계열인 재일조선인 연맹, 우익계열인 재일조선인 거류민단 . 김총령(재일동포, 한국적, 전 통일일보 논설위원) 인터뷰 - 재일동포사회에 대한 관심사가 달랐던 남과 북 . 재일동포사회에 유일한 관심은 반공이었던 이승만 정권과 재일 동포들의 최대 관심사였던 민족교육을 적극 지원했던 김일성 . 김태기(호남대 일본학과 교수), 고봉전(재일동포, 조선적, 전 총련계 민족학교 교사) 인터뷰 - 재일동포의 법적지위에 무관심했던 한일협정 . 이규섭(재일동포, 민단 효고현 권익옹호위원장) 인터뷰 - 협정영주권 신청을 체제경쟁으로 인식했던 한국 정부 . 김태기 인터뷰 24:01- 공작정치 - 녹음날조 사건 . 김성호(재일동포, 한국적, 전 민단동경본부 선전부장), 조일제 (전 중앙정보부 보안차장보), 김총령 인터뷰 - 중앙정보부에 의해 파괴된 재일동포들간의 인간관계 . 정재준(재일동포, 한국적, 전 민단동경본부 단장), 조일제 인터뷰 - 남북공동성명에도 불구하고 총련계와 민단계가 함께 할 수 없었음 . 이규섭(공동대회 참가로 민단에서 제명) 인터뷰 - 75년 총련계 재일동포 모국방문으로 세가 커진 민단 . 조일제 인터뷰 33:05- 간첩만들기 - 재일동포를 간첩으로 만드는 고문과 날조 . 조일제, 김병진 인터뷰 - 왜 그들은 간첩을 만들었는가 . 김병진 인터뷰 - 개인의 진실이 철저히 외면된 재판 . 마쯔모토 히로시(변호사, 이철 구명운동), 이철, 김병진, 강신옥(변호사, 전 판사) 인터뷰 41:21- 북의 희생양 - 북에 귀국했으나 간첩 혐의를 받고 죽어갔던 사람들 . 김민주(재일동포, 한국적, 북조선 귀국자 생명과 인권을 수호하는 모임 대표) 인터뷰 44:38- 분단 없는 일본땅에 분단된 동포사회 - 재일동포를 남북 서로가 이용 - 김총령, 김규일(재일동포, 조선적, 재일동포를 생각하는 모임 대표), 이철 47:10- 다음회 예고 47:59- 후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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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1, 8회 | 20010629 | 51분 | 상세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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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블로 나포 사건> 내용
한반도에 또다른 전쟁의 불씨가 될 뻔 했던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과 그 파장을 통해 남북관계, 북미관계의 어제와 오늘을 재조명한다. 당시 푸에블로호의 북한 영해 침범 여부를 두고 북?미 간에는 11개월 간 뜨거운 설전이 붙었고, 미국은 83명의 승무원 송환과 다친 자존심 회복을 위해 핵무기 동원까지 고려했다는데……. 결국 미국의 사과를 받아낸 북 한의 승리로 사건은 종결되는 듯 했으나, 미국은 승무원 송환 이후 사과 를 번복하였고, 억류 당시 영해 침범을 인정했던 승무원들은 북의 강압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자백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를 그대로 믿기에는 나포 당시 송신 기록과 항해장비의 오차 등 석연치 않은 증거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과연 누구의 말이 진실인가. 푸에블로 승무원들과 한?미 외교담당자, 그리고 탈북자의 증언을 통해 세 나라가 기억하는 푸에블로의 진실을 추 적한다. 더불어, 68년 전세계적인 냉전의 끝자락에서도 차디찰 수 밖에 없었던 한반도의 긴박한 상황을 되짚어 보고,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현 상황에서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당시 사건의 교훈을 살펴본다. 00:00- 타이틀 00:13- 프롤로그 -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기습사건과 이틀 후인 23일 미 해군 함정 푸에블로호 나포 01:54- 전CM 04:41- 푸에블로호 나포로 일촉즉발의 대치상황으로 치닫게 된 북한과 미국 - 미국, 세계유일 핵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원산 앞바다에 급파 - 남한은 1.21사건으로 이미 준전시상황 - 장해성(탈북자, 당시 원산에서 군 복무), 박상운(탈북자, 전 인민군 소좌), 윤하정(당시 외무부 미국과장) 인터뷰 07:02- 미 해군 푸에블로호 북한에 나포 - 북한과 소련 해역 정탐 임무 - 암브리스터('푸에블로 사건의 진실' 저자), 부커(푸에블로호 함장), 랑겐버그(푸에블로 승무원), 맨클린톡(푸에블로 승무원), 머피(푸에블로 부함장), 러셀(푸에블로 승무원) 인터뷰 10:00- 강경한 미국의 대응 - 핵무기 사용까지 검토했다는 기밀문서 최근 공개 - 로스토우(당시 백악관 안보담당보좌관), 무어러(당시 미 해군 참모총장) 인터뷰 11:49- 북한과 미국간의 비밀협상 - 제임스 리(판문점 협상 미군측 통역), 박성범(당시 취재기자) 인터뷰 - 남한에도 공개되지 않는 협상 내용 . 박정희 대통령 북한의 도발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는 미국에 불만 표시, 대규모의 반미 데모 . 윤하정, 박성범, 레오너드(당시 미 국무성 한국담당과장) 인터뷰 - 1억달러 군사원조를 골자로 하는 한미공동성명 . 레오너드, 김점곤(전 국방차관보) 인터뷰 16:46-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던 북한 - 북한 다큐멘터리 '푸에블로호의 말로' - 장해성 인터뷰 17:48- 왜 미국은 전쟁을 염두에 두지 않았나 - 1975년 캄보디아의 마야구에즈호 나포, 1964년 통킹만 사건 등에서는 강경한 무력 보복을 가했음 - 레오너드, 로스토우김영구(부산 해양대 교수/국제해양법) 인터뷰 - 푸에블로호의 비밀스런 통신감청 임무 . NSA의 정보수집함이었던 푸에블로호 . 맥클린톡(푸에블로 통신감청요원), 해리스(푸에블로 통신감청대 대장), 암브리스터, 무어러, 뱀포드(NSA 연구가), 랑겐버그 인터뷰 26:24- 푸에블로호는 북한의 영해를 침범했나 - 푸에블로호 승무원 자백 기자회견 - 64.1.24 CIA 보고서 - 부커, 김정민(탈북자, 당시 사회안전성 근무), 장해성, 박성범, 리스톤('푸에블로 항복' 저자), 뱀포드, 해리스 인터뷰 - 미국측의 조사 결과 . 푸에블로호 무선 송신 기록 . 승무원 본국 송환 후 열린 1969년 1월 미 해군 조사위원회 . 머피(푸에블로 부함장겸 항해사), 허일(부산 해양대 교수), 정태권 인터뷰 - 북한의 조사 결과 . 북한이 노획한 푸에블로호 항해 기록, 배에서 입수한 미 태평양함대 명령서 - 삭제되거나 감춰진 당시 문서들 . 러셀 인터뷰 37:03- 당시 미국의 내부 사정 - 무어러 인터뷰 38:22-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극단으로 치닫는 남북간의 긴장 - 북한 무력도발, 남한 반공의식과 군사력 강화(예비군 창설) - 윤희복(당시 북파공작원), 허창걸(탈북자, 당시 철원에서 인민군 복무), 윤하정 인터뷰 40:39- 북한과 미국의 협상의 결과 - 레오너드, 윤하정, 제임스 리, 부커 인터뷰 44:41-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이 남긴 것은 무엇인가 - 박상운 인터뷰 47:12- 다음회 예고 47:52- 후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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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1, 7회 | 20010622 | 50분 | 상세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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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일본 참전의 비밀> 내용
한국전쟁의 일본 참전! 지금까지는 이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으 나 최근 비밀해제 된 일본외교문서에 따르면 유엔극동군사령부(GHQ)의 요 청에 의해 원산상륙작전에서의 기뢰 제거 참여를 중심으로 세균전, 정보 부대, 첩보부대, 노무자 등에서 참여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고, 포로와 전사자들의 신원도 드러나고 있다. 이에 참여자들의 증언과 비밀해제 문서를 통한 일본의 참전 사실을 밝 히고 일본이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한 이유와 그 뒤에 숨겨진 미국과 일 본과의 관계를 알아본다. 또한 1945년 북한의 흥남지역에서 있었던 일본 원폭 개발 의혹과 한국전쟁의 연관성을 추적해본다. 00:00- 프롤로그 -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일본 해군의 소해부대 - 오가 료헤이(한국전쟁 참전), 요시오카 요시노리(일본 국회의원), 오오모리 유타카(전 아사히신문 기자), 아이가와 가즈모리 (한국전쟁 참전) 인터뷰 01:39- 타이틀 02:17- 전CM 05:05- 명령에 의해 참전했던 사실을 묻어둬야 했던 사람들 - 고오노 마쓰미(당시 한국전쟁 참전), 나카타니 토오시 (한국전쟁에서 숨진 나카타니 사카타로의 형) 인터뷰 08:19- 일본군의 한국전쟁 참전설 - 박종린(전 인민군 8사단) 인터뷰 - 소련의 외교문서에 나타난 일본 부대 참전 . 가브릴 코르트코프(러시아 전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인터뷰 - UN회의에서도 화두로 떠오른 일본 참전 10:40- 해상보안청장의 명령으로 소집된 구일본 해군 '일본특별 소해대' - 아이가와 가즈모리(당시 해상보안청 소속 MS16호 부함장), 오오니시 미찌나가(당시 해상보안청 소속 MS14호 부함장) 인터뷰 -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상하는 전선의 보급 문제 - 원산상륙작전을 방해하는 소련제 기뢰 . 남상휘(당시 해군 포항경비부 사령관), 야마자키 시즈오 ('한국전쟁 협력의 전모' 저자) 인터뷰 14:41- 미 해군사령부의 일본 정부에 대한 기뢰 제거 위한 소해정 참전 요청 - 신헌법에 의해 무력행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극비리에 진행해야 했던 일본 정부 - 오오모리 유타카, 남기정(일본 도호꾸대학 교수) 인터뷰 16:44- 일본특별소해대의 기뢰제거 작업 - 아이가와 가즈모리, 오가 료헤이, 오오니시 미찌나가 인터뷰 20:04- 일본은 왜 희생을 감수하며 이 작전에 참여했나 - 미군 상륙작전이 있을 때마다 일본특별 소해대가 먼저 출동해 소해작업 - 패전이후 아직 미국에게 점령당한 채인 일본 . 전쟁협력을 통해 일본의 입장을 강화시키려 함 . 남기정 인터뷰 - 미국을 통해 일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을 받고자 한 한국 . 지갑종(유엔한국참전국협회 회장, 한국전쟁 당시 종군기자) 인터뷰 - 독도를 비롯한 영토 관련 문제 . 정성화(명지대학교 교수) 인터뷰 - 한국전쟁을 일본 부활의 계기로 삼으려 한 일본 우익 . 오누마 히사오(마에바시국제대학 교수), 남기정 인터뷰 - 한국전쟁을 통해 전후 파탄상태에 이르렀던 경제 회복 . 마에다 데츠오(도쿄국제대학 교수), 야마자키 시즈오 인터뷰 29:13- 소해대원 외에 한국전쟁에 참여한 병사들 - 미군도 일본 정부도 이들의 참전에 대해 모호한 설명만 함 - 52년 말 전선 교착상태에 들어서고 포로 교환이 이루어지면서 공식적으로 일본의 참전이 확인됨 - 요시오카 요시노리 인터뷰 30:41- 미국에겐 낯선 전장인 한국에 대한 도움을 구일본군에게서 받음 - 미 국회에서 논의된 일본군 참전 - 닐스 본드(당시 주한 미국대사관 참사관), 연정(당시 맥아더 사령부 정보장교), 브루스 커밍스('한국전쟁의 기원' 저자) 인터뷰 - 인천상륙작전에 동원된 구일본군정보참모 . 닐스 본드, 연정 인터뷰 36:53- 미군의 세균전 의혹과 맞물린 일본의 참전 의혹 - 1951년 38선 근처에서 전파된 유행성출혈열 - 쯔네이시 케이이찌(가나가와대학 교수), 곤도 쇼지(세균전 전문가) 인터뷰 - 731부대의 미국 공조 . 곤도 쇼지, 브루스 커밍스, 쯔네이시 케이이찌 인터뷰 - 731부대 다시 일본사회의 주류로 부상 . 일본혈액은행이라는 조직 설립(한국전선에 수혈용 혈액으로 제공) . 마쓰무라 타카오(게이오대학 교수), 쯔네이시 케이이찌 인터뷰 42:42- 샌프란시스코 조약 43:40- 전범국가에서 세계3위의 군사예산 규모의 자위대로 - 1998년 일본 자위대의 영토탈환훈련 - 마에다 데츠오(도쿄국제대학 교수) 인터뷰 46:14- 다음회 예고 46:51- 후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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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1, 6회 | 20010608 | 53분 | 상세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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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 타이틀
- 1984년 유화국면에서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간첩 사건. 양동화, 김성만, 황대권, 김형걸이 말하는 사건의 진실과 고문수사의 실상 05:04- 금융회사 기획실에서 일하던 김형걸(간첩 방조죄) 07:36- 안기부로 끌려가 조사 받고 방조죄로 체포된 김성만 - 안기부에서 제시한 증거품들 10:00- 양동화 입북 경로, 김성만 북한대사관 접촉 경로, 황대권 귀국 경로 11:17- 양동화.황대권.김성만 안기부 연행 - 이창신(재미간첩죄, 불구속) 인터뷰 15:37-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한국 장기수에 대한 보고서 17:45- 86년 가족들의 구명운동, 호소문 19:05- 전 안기부 남산 대공분실,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 23:38- MBC 보도특집 '학원에 뻗친 붉은 손길'에 출연한 사건 관련자들 26:12- 간첩단 사건 신고자 최형호 인터뷰 28:14- 서울지방검찰청 수사 기록, 판결문 - 고영구(당시 김성만 변호인) 인터뷰 30:53- 간첩 방조죄로 감옥에 간 김형걸로 인해 화병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33:09- 황대권의 옥중 편지와 자술서 - 황대권(간첩죄, 13년 복역) 인터뷰 40:14- 유엔 인권위원회 자의적 구금 결정 40:32- 수많은 가정을 파괴한 국가보안법 43:17- 양동화.김성만.황대권.강용주, 출소 후의 삶 - 이재현(당시 웨스턴 일리노이대 교수) 인터뷰 48:49- 클로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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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1, 5회 | 20010601 | 53분 | 상세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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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억불의 비밀, 한일 협정> 내용
한국과 일본 양국의 국가 및 국민간의 청구권 문제를 해결하고, 과거 식 민지 시대를 청산하기 위해 이루어진 한일 기본 조약. 그런데 왜 개인의 보상은 해결되지 못한 것일까. 쿠데타 직후 한일 회담을 적극적으로 추진 해온 박정희 정권. 쿠데타는 성공했지만 정통성을 확보하지 못한 그는 국 민들의 환심을 살 수 있는 경제개발이 시급했다. 경제 개발을 위해 많은 '돈'이 필요했던 박정희는 사죄하지 않고 '돈'으로 결론을 지으려는 일본 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마침내 경제협력으로 뜻을 맞춘다. 결국 1962년 6차 회담이후 개인 보상의 기회는 사라지고 만다. 한일 양국의 협력, 그것은 바로 미국의 오랜 숙원이었다. 냉전 시대, 동 북아에서 공산 세력을 봉쇄해야하는 미국에게 한일 양국의 협력은 전략상 더없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베트남전이 본격화되면서 미국에게 한일 협정은 더욱 절실해졌고, 회담 타결 몇 달 전 한일 양국에 전문을 보내 협정 체결의 마침표를 찍는다. 결국 한일 조약 조인식은 6월 22일 오후 5시에 서둘러 이루어졌다. 독도, 어업권, 문화재 반환까지 많은 문제들을 그대로 묻어둔 채. 그후 박정권은 6억달러를 기반으로 경제 개발을 추진 한다. 그러나 그 성장가도에 정작 피해자들의 자리는 없었다. 00:00- 타이틀 00:42- 전CM 03:31- 65년 한일협정 - 도쿄와 서울에서의 반대 시위 - 이동원(당시 외무장관) 인터뷰 - 01년 계속되는 한일회담 반대 . 일본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종군위안부들의 수요집회 . 김순덕, 황금주 인터뷰 - 북한과 일본의 수교협상 . 일본과 수교협상중 정부차원의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북한과 한일 협정과 같은 방식으로 협상해야 한다는 일본 - 재일한국인 징병피해자들의 시위 . 오시마 야나기(전후보상회) 08:21- 한국, 북한, 일본에서 계속되는 문제의 근원: 한일기본조약 - 해결되지 못하는 개인에 대한 보상 - 협상을 통해 청구권으로 얼마를 받는지가 최대 관건 . 이동원 인터뷰 - 격렬한 반대: 6.3 사태 . 김도현(6.3 사태 주도), 마찌다(당시 외무성사무관) 인터뷰 10:41- 일본에 의한 강제 징용, 징병 피해자들 - 탄광 징용자들, 징병자들, 여운택(일본제철 징용) 인터뷰 -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기록된 개인의 피해에 대한 조사 . 김형국(정부기록 보존소 연구원) 인터뷰 - 받아야 할 돈을 받기 위한 출발이었던 한일회담 . 정일영(60~62년 한일회담 대표) 인터뷰 - 계속적으로 증거 제시를 요구하는 일본 . 개인보상에 관한 논의 지속 불가 . 쯔루다 쯔요시(당시 외무성 사무관), 정일영 인터뷰 16:10- 한일협정이 끝난 30여년 후 일본이 보내온 군인, 군속 명부 - 김은식(태평양전쟁 피해자회 사무국장) 인터뷰 17:07- 10억 대동아공영권건설 기치 아래 자행되었던 징용, 징병 피해 보상 -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 . 한일협정으로 모든 게 끝났으니 일본 정부는 법적인 책임이 없다는 판결 . 강부중(해군징병), 석성기(1944년 부상, 오른팔 절단) 인터뷰 . <잊혀진 황군>(감독: 오시마 야나기, 1963) . 한일 관계 정상화 이후에 한국 정부를 통해 요구하라던 일본 총리실의 공식 답변 - 한일 협정 체결 후 서로 상대방에게 책임을 미루는 양국 . 마찌다, 이동원 인터뷰 - 한일조약을 통해 완전히 종결된 청구권 . 한국이 보상금 청구권에 관한 조항을 빼고 발표 . 이종원, 김경득(군인, 군속 재판 변호사) 인터뷰 - 자국민에 대한 일본 정부의 보상 정책과의 비교 . 가토 키타로(중국 화북지방 참전), 김경득 인터뷰 - 한일 협정에서의 일본의 의도 . 야마다 쇼지(릿쿄대 교수) 인터뷰 - 경제개발을 위해 돈이 필요했던 박정희 정권 . 이동원, 김윤환(당시 조선일보 주일 특파원), 박병식 (말레이시아 참전), 여운택 인터뷰 28:40- 강제종군위안부의 증언 29:43- 북일수교회담에서 북한의 입장 - 야마다 쇼지, 정태화(북일수교 대표 단장), 다카사키 쇼지 (쓰다주쿠 대학 교수), 강만길(통일고문회의 고문/상지대 총장) 인터뷰 - 북일수교회담에 대한 남한의 입장 . 야마다 쇼지 인터뷰 32:06- 정권의 사활을 건 김종필의 담판 - 김-오히라 메모 - 마찌다, 김정태(당시 외무부 동북아 과장) 인터뷰 33:50- 미국의 개입 . 로스토우(케네디 대통령 특보), 이종원(릿쿄대 국제관계법 교수), 글라이스틴(당시 주일대사관 근무), 톰슨(당시 국무차관 특보) 인터뷰 - 박정희의 출현을 환영한 일본 . 정경모(50~56년 미 국방성 근무, 일본 망명) 인터뷰 - 한일 양국의 협력을 원한 미국 . 냉전 시대 동북아에서 공산 세력의 봉쇄, 베트남전 . 일본의 첫 사과발언(시이나 외상) . 이종원, 김도현, 이동원 인터뷰 41:54- 6억달러를 기반으로 경제개발 추진 42:23- 성장가도에서 소외된 징용, 징병 피해자들 - 김영상(중국전선 징병) 인터뷰 - 제대로된 보상을 받지 못한 피해자들 . 박찬종(당시 법제사법위 의원) 인터뷰 -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시간 속에 기다림으로 살아온 사람들 . 조영순(징병 사망자 딸), 나초음(징병 사망자 부인) 인터뷰 46:33- 비뚤어진 조약 한일협정, 앞으로 해야 할 일 - 다카사키 쇼지, 기마야 다다시(동경대 교수), 야노 히데키 (징용자 소송 지원회), 강만길 49:25- 다음회 예고 49:57- 후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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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1, 4회 | 20010525 | 64분 | 상세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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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 승자와 패자> 내용
프랑스는 나치와의 전쟁에서 자신들의 힘으로 승리하고 나치에 대한 협 력자들을 처단함으로써 그들 스스로의 정의와 질서를 수립할 수 있었다. 1945년 서울, 우리의 해방은 사실상 미군의 진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우리의 현대사는 전후의 냉전체제에 구속되어야만 했다. 그러한 현실은 우리에게 민족반역자에 대한 청산을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시도는 있었 다. 민족의 이름으로 친일파를 처단했던 반민특위가 그것이다. 일제에 협 력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민족에게 고통을 가한 이들이 줄줄이 반민 특위 재판장에 섰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해체되고 낡은 사진 한장으로만 남았다. 승자와 패자는 누구인가. 00:00:00- 타이틀 00:00:14- 프롤로그 00:02:18- 전CM 00:05:36- 이광우와 하판락의 진실 공방 - 이광우(독립운동가), 하판락 인터뷰 00:11:29- 혹독한 일제의 식민통치에 가담했던 조선인들 00:12:30- 45년 해방 이후 일본군이 떠난 자리에 들어온 미군 - 미군정과 이승만, 임정과 김구 - 보수 기득권과 손잡은 미군정 . 여과없이 등용된 일제하의 관공리들 - 안보라는 명목하에 경찰에 등용된 친일파 . 미군정 경찰간부중 일제 경찰 출신 비율 . 장석윤(당시 미군정 G-2 고문관), 선우진(당시 김구 비서) 인터뷰 - 47년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에서 친일파 처벌에 대한 조례안 통과 . 미군정 법안서명 거부 . 서중석(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인터뷰 00:19:05- 반민족 행위 처벌법 - 김인식(제헌의원) 인터뷰 -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 - 반민자 제보접수 시작 . 백재호(반민특위 전남 조사관), 이원용(반민특위 총무과장) 인터뷰 - 반민특위 특경대 - 박흥식을 시작으로 친일파 검거 . 이병창(특경대 부대장), 이원용, 백재호 인터뷰 - 반민자에 대한 공판 개시 . 오소백(당시 합동통신 기자), 이혜복(당시 동아일보 기자) 인터뷰 00:28:57- 반민특위의 한계: 반공 문제 - 이승만의 입장(반민특위에 대한 불편한 심정) - 변창선(관악 경우회 회장, 경찰1기로 당시 수도 경찰청 근무) 인터뷰 00:30:20- 반민특위에 대한 친일세력의 방해 공작 - 반민특위 간부 암살 음모 사건 - 국회 프락치 사건 . 친일세력들의 반공 대회 . 김인식, 김지연(경남대 극동문제 연구소), 백재호 인터뷰 - 시 경찰대 반민특위 기습 . 선우진, 이원용, 이병창, 심윤(반민특위 경남 조사관), 변창선, 장석윤(미군정 고문관/치안국장 역임), 김정육(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아들) 인터뷰 - 흐지부지 끝나고 만 반민특위 . 이원용, 선우진, 선우종원(당시 검찰과장) 인터뷰 - 1949.6.26 김구 피격 서거 . 서중석 인터뷰 - 반민특위 343일 실적 . 기소된 반민족 행위자 전원이 무죄판결로 풀려남 00:43:54- 파리 해방 후 나치 협력자 숙청 - 주로 레지스탕스에 의한 비공식적인 즉결처형 . 앙리 아모르(저널리스트) 인터뷰 - 드골 훈령을 통한 나치 협력자 숙청 . 마르크 페로(사학자, 레지스탕스 출신) 인터뷰 - 독일에 항복했던 비시정부 -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처벌 . 각국의 나치협력자 처벌(징역형):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 노르웨이, 한국(친일파) -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민족반역자 처벌 . 마담 클라라, 소니아 자매(바르비 재판 증인/아버지가 희생) 인터뷰 00:52:51- 반민특위 김철호의 죽음에 관한 의문 - 김용민(김철호 반민특위 경남 조사관 아들), 김경자(김철호 반민특위 경남 조사관 딸), 이승호(전 부산일보 통영 주재 기자), 전갑생(경남 근현대사 연구소) 인터뷰 00:59:56- 다음회 예고 01:00:30- 후CM |
프로그램 구입안내
02-789-0123- 평일:09:00~18:00
- 점심:12:00~13:00
- 토요일, 공휴일 휴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