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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방영회 | 방영일 | 방영시간 | 상세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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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5, 14회 | 20050626 | 60분 | 상세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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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회 특집, 7년의 기록> 내용
현대사 다큐멘터리가 100회를 맞은것은 우리나라 방송 최초이자, 세계적 으로도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 금기와 성역의 그림자가 그만큼 크고 짙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격동의 시 대, 역사의 갈피에 숨겨진 진실을 똑바로 응시하고자 했고, 그 결과 그 동안 우리가 알고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우리 현대사의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지난 7년간의 기록속에 담긴 고통스러웠 던 우리 현대사의 내면을 다시 한번 들여다 보고자 한다. 00:00:00- 타이틀 00:00:09- 오프닝(김환균) 00:01:22- 전CM 00:06:24-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국가 - 1999년 12월 19일 방송 <실미도 특수부대> - 2000년 12월 19일 방송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 - 전태일 그 후> . Making Film 영화 '전태일' - 2003년 2월 19일 방송 <45계획, 10.27 법난의 진실> - 2003년 5월 4일 방송 <인권의 무덤, 청송감호소> - 2002년 2월 24일 방송 <북파공작원> 2부작 - 2000년 1월 27일 방송 <버림받은 희생, 삼청교육대> 00:12:55-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레드 콤플렉스 - 반공의 기치 아래 청산되지 못했던 친일파 문제 . 2001년 5월 25일 방송 <반민특위 - 승자와 패자> . 2002년 3월 10일 방송 <53년만의 증언, 친일경찰 노덕술> - 2002년 1월 20일 방송 <비밀결사 - 백의사> - 1999년 9월 12일 방송 <제주 4.3> - 2001년 4월 27일, 5월 4일 방송 <보도연맹> 2부작 - 2004년 7월 18일, 7월 25일, 8월 1일 방송 <한국전쟁과 포로> 3부작 - 1999년 10월 3일 방송 <조봉암과 진보당 사건> - 2000년 10월 8일 방송 <민족일보와 조용수> - 2001년 8월 17일 방송 <박정희와 레드콤플렉스 - 황태성 간첩사건> - 2001년 6월 8일 방송 <조국은 나를 스파이라 말했다> - 2001년 8월 3일 방송 <마녀사냥 - 도시산업선교회> - 2001년 8월 10일 방송 <전향공작과 양심의 자유> - 2004년 7월 11일 방송 <1994년 그 해 여름 - 조문 파동과 공안정국> 00:39:06-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미국 - 2004년 3월 21일 방송 <분단의 기원> - 1999년 11월 14일 방송 <노근리 사건의 진실> - 2000년 7월 2일 방송 <일급비밀! 미국의 세균전> - 2003년 2월 9일 방송 <섹스 동맹 - 기지촌> - 2000년 9월 24일 방송 <어둠속의 외침 -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 2001년 7월 27일 방송 <이승만을 제거하라 - 에버레디 플랜> 00:47:13-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변화한 현실과 당면 과제 - 양심과 사상의 자유, 그리고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 - 2005년 4월 24일, 5월 1일, 5월 8일 방송 <한국의 진보> 3부작 - 2005년 5월 29일 방송 <10.26 궁정동 사람들> - 2005년 6월 12일 방송 <끝나지 않은 비밀 프로젝트, 일본의 원폭> - 2005년 6월 19일 방송 <2005 한반도 위기, "북한은 핵을 갖고 있다"> 00:56:25- 클로징(김환균) 00:57:53- 다음회 예고 00:58:31- 후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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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 20050619 | 55분 | 상세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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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5, 13회 | 20050619 | 55분 | 상세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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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한반도 위기, "북한은 핵을 갖고 있다"> 내용
2004년 1월, 북한은 미국의 민간 방북단을 초청해 2002년 10월 이후 최 초로 영변의 핵시설을 공개하고 보유하고 있는 플루토늄을 직접 보여주었 다. 놀라운 것은 2002년 11월과 2005년 2월에 CIA도 미 의회에 제출한 보 고서에서 북한의 HEUP 에 대해 "명확한 증거가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 핵무기의 보유여부 및 수량, 고농축 우라늄 존재여부까지 확실한 것은 거의 없는데도 불구하고, 미 정부는 북한이 1~2개의 핵무기를 갖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북한의 "자위를 위해 핵무기를 만들 었다"는 주장은 도리어 미 강경파들의 입지를 강화시켜 미국의 핵무장의 구실을 제공하고 있는데... 00:00- 타이틀 00:12- 프롤로그 01:26- 전CM 04:50-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면담 - 6.15 방북단 귀국(2005.6.17) 06:01- 변화하는 평양 -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 방한(2002.10.2) - 북일 정상 회담(2002.9.17) 07:48- 부시 행정부 첫 북미간 대화 - 김근식(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인터뷰 - 북한의 핵 프로그램 시인 . 로버트 갈루치(전 미 국무부 차관보) 인터뷰 - 북한에 대한 클린턴 행정부와 부시 행정부의 차이 - 감시카메라를 끄고 핵사찰관 추방 - 북한 핵확산금지조약 전격 탈퇴 선언 - 구체적인 군사적 출동을 가정한 대비책 논의 . 한미안보연례회의(2002.12.6) . 칼 포드(전 미 정보국 차관보) 인터뷰 14:27- 오프닝(김환균) 15:30- 북한은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가 - 케네스 퀴노네스(전 미 국무부 북한 담당관) 인터뷰 - 회담 첫 날, 켈리가 증거가 있다며 북한을 추궁 . 북한은 계속 부인 . 잭 프리처드(전 미 국무부 대북교섭담당 대사) 인터뷰 - 회담 이튿 날, 강석주의 폭탄 발언 . 강석주의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 시인 발언이 있었다는 잭 프리처드의 주장 . 잭 프리처드, 칼 포드 인터뷰 - 2주간 기밀에 붙여졌던 켈리의 방북 내용 . 데이비드 생거(뉴욕 타임즈 기자) 인터뷰 - 강석주 발언 내용에 대한 북미의 공방 . 최진수 중국 주재 북한대사 회견(2002.11.1) . 케네스 퀴노네스, 셀리그 해리슨(국제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 인터뷰 - 미국이 가지고 있다는 반박할 수 없을만한 정보는 무엇인가 . 파키스탄과 북한간의 핵-미사일 커넥션 언급 . 잭 프리처드, 로버트 아인혼(전 미 국무부 군축 담당 차관보) 인터뷰 - 고농축 우라늄 계획을 알고도 방북을 단행한 고이즈미 총리 . 아미티지 미 국무부 부장관 방일(2002.8.27) . 잭 프리처드, 다나카 히토시(전 일본 외무성 아주국장) 인터뷰 - 제네바 합의를 통해 끌어왔던 북미간 평화의 끝 . 케네스 퀴노네스, 글렌 케슬러(워싱턴 포스트 북한전문 기자) 인터뷰 27:00- 클린턴 행정부와 다른 대북정책을 가진 부시 행정부 - 데이비드 프롬(2002 연두교서-'악의 축' 발언 작성자) 인터뷰 - 호로위츠의 메모를 통해 드러난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 . 마이클 호로위츠(허드슨 연구소 선임 연구원), 데이비드 프롬, 존 파이크(글로벌 시큐리티 소장) 인터뷰 - 북한 겨냥한 핵 선제공격 비밀계획 콘플랜 8022-02 . 윌리엄 아킨(미 군사전문가) 인터뷰 30:47- 북한의 핵 보유 선언은 거듭되지만 그 정도에 대한 증거는 없는 상황 - 미 의회에 제출된 CIA 보고서(2002.11.22) - 데이비드 올브라이트(국제안보연구소-ISIS 소장), 셀리그 해리슨 인터뷰 32:48- 신뢰할 수 없는 북한과 파키스탄과의 커넥션 주장 33:20- 북한의 핵 능력은 어느 정도인가 - 북한의 플루토늄 보유량 추정치 . 미 국회의원단 방북 후 기자회견(2005.1.18) . 데이비드 올브라이트 인터뷰 - 민간 방북단의 핵시설 참관 . 미 민간 방북단 방북(2004.1.6) . 잭 프리처드 방북 후 기자회견(2004.1.15) . 잭 프리처드 인터뷰 - 위성사진을 통해 추정해 보는 영변 재처리 시설 가동 여부 . 데이비드 올브라이트 인터뷰 - 북한이 민간 방북단을 초청해 핵물질을 보여준 이유 . 잭 프리처드 인터뷰 40:35- 미국에 감시당하고 있는 상황을 이용하려는 북한정부의 위험한 게임 - 찰스 퍼거슨(미국 외교협회 핵 자문위원) 인터뷰 - 북한에 대한 확인되지 않은 정보가 확실한 뉴스인것처럼 제시 . 데이비드 생거, 윌리엄 아킨 인터뷰 - 정확하지 않은 정보로 시작되었던 이라크 침공 . 데이비드 올브라이트 인터뷰 46:25- 북핵문제의 해법은 무엇인가 - 한미 정상 회담(2005.6.10) - 부시 미 대통령 연두교서(2002.1.29) - 웬디 셔먼(전 미 대북정책 조정관) - 북핵과 6차회담에 대한 미국의 입장 . 3차 6자회담(2004.6.23) . '북핵:포용정책에 대한 논의'(빅터 차: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 국장) . 잭 프리처드 인터뷰 53:05- 다음회 예고 53:44- 후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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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5, 12회 | 20050612 | 51분 | 상세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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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비밀 프로젝트, 일본의 원폭 개발> 내용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패배 후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일본 군부는 원 폭을 개발하기로 하고 이를 동경대 이화학연구소에 지시한다. 1945년 3월 동경 대공습으로 일본 내에서의 개발이 어렵게 되자 일본은 북한지역에 있는 흥남에서 원폭개발을 계속한다. 1947년 연합군사령부 정보 보고서는 놀라운 내용이 들어있다. 1945년 8월 12일 흥남 앞바다에서 섬광과 버섯 구름을 동반한 폭발이 있었으며 천 야드 정도 되는 직경의 불덩이가 하늘 로 솟았다는 것이다. 한편, 1940년대 미국 역사상 최초로 본토가 공격을 받아 6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일본은 Z기류를 이용해 9천 개의 풍선폭탄을 미국을 향 해 날렸고, 이중 1천여 개가 미국 본토에 떨어져 미국 본토를 유린했다. 이 풍선폭탄의 최종목표는 원폭을 탑재하는 것이었다. 1945년 5월. 일본 으로 향하던 독일 잠수함은 독일이 항복하자 미국에 가서 항복했고, 이 배안에 우라늄 560kg이 들어있는 것이 밝혀지자, 미국은 경악했다. 패전의 상흔이 아물기도 전인 1954년 당시 국회의원인 나카소네의 주도 로 일본은 원자력기본법을 통과시킨다. 이로써 2차대전 때 원폭개발의 전 력을 지닌 일본은 또 한 번 핵무장의 기초를 쌓을 수 있게 된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핵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 일본의 원폭개발 프로젝 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00:00- 타이틀 00:13- 프롤로그 01:09- 전CM 03:42- 1945년 日로 향하던 독일 잠수함 U-234호에서 발견된 우라늄 560kg - 모토아키 쇼지(겐죠 쇼지의 유족) 인터뷰 05:11- 오프닝(김환균) 05:37- 미드웨이전 패배 후 혁명적인 무기 개발을 지시한 일본 정부 - 야마자키 마사카스(동경공대 물리학과 교수) 인터뷰 - 원자폭탄 개발 계획 추진 . 야마자키 마사카스 인터뷰 - 니시나 박사를 주축으로 한 니시나 연구소에서 원폭 개발 담당 . 키고시 쿠니히코(당시 원폭개발팀), 후쿠이 슈지(당시 원폭 개발팀) 인터뷰 - 폭탄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어마어마한 양의 우라늄 . 체코의 우라늄 광산을 차지한 독일에게 우라늄 요청 . 키고시 쿠니히코, 히라노 사다오('소화 천황의 극비지령' 저자), 오자키 키쿠타이(당시 육군정보장교) 인터뷰 - 1945년 3월부터 본격화된 미국의 동경 공습으로 이화학연구소 파괴 . 원폭개발연구의 주요 거점이었던 이화학 연구소의 핵심 연구 시설인 우라늄 분리기 파괴됨 . 이화학연구소 45년 4월 정련시절 이전 . 키고시 쿠니히코, 후쿠이 슈지, 아리카 키와무(이시가와 주민) 인터뷰 - 연합군 비밀보고서에 일본이 흥남에서 원자폭탄을 개발했다는 기술 16:16- 왜 일본 땅이 아닌 한반도에 원폭 개발 실험지가 있었나 - 1940년대 흥남공업단지 . 주종덕(당시 흥남공장 근무) 인터뷰 - 풍부한 전력, 인접한 우라늄 광산의 장점을 가진 흥남 . 나카네 료헤이(당시 우라늄 분석 책임자) 인터뷰 - 원폭개발의 또 다른 이름 'NZ 프로젝트' . 채창신(당시 흥남공장 근무), 주종덕, 문봉수(당시 흥남공장 근무) 인터뷰 - 흥남에 있었던 고성능 폭탄을 만든다는 정체불명의 공장 건물 . 문봉수(당시 흥남공장 근무) 인터뷰 - 원폭개발 핵심멤버였던 유가와 히데키가 흥남에 자주 다녀감 . 최기선(당시 흥남에 있던 노구치 연구소 연구원) 인터뷰 - 종전 후 피폭조사단이 발견한 일본 원폭 개발의 정보 . 레온 톰슨(당시 일본 피폭 조사단) 인터뷰 - 흥남 앞바다 원폭 실험 여부 . 강정민(서울대 핵공학 박사), 야마자키 마사카스 인터뷰 - 한국전쟁 시 흥남 철수 이면에 숨겨진 일본 원폭 개발의 역사 . 1940년 미 공군 작성 보고서 . 양승호(당시 흥남공장 근무) 인터뷰 25:56- 일본이 미국 본토 공격을 목표로 개발한 풍선 폭탄 - 풍선폭탄으로 인한 미 본토의 피해 . 야마자키 마사카스 인터뷰 - 가미카제나 인간어뢰 회천 등에 원폭이 탑재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 . 히라노 사다오 인터뷰 - 다급해진 미국의 원폭 개발, 일본에 무조건적 항복 촉구 - 미국의 원자폭탄 공격과 연합군의 일본 점령 . 미국은 일본을 점령하자마자 동경대 이화학 연구소 수색하여 입자가속기 동경 앞바다에 수장시킴 . 후쿠이 슈지 인터뷰 32:30-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원폭개발이라는 비밀 프로젝트 - 원폭피해와 이로 인한 반핵운동에 앞서온 일본 . 피폭 자리에 조성된 히로시마 평화공원 . 와타나베 미치코(원폭 피해자) 인터뷰 - 사토 에이사쿠, 일본의 핵에 관한 이중성 . '비핵 3원칙'으로 노벨 평호상을 수상했으나, 동시에 핵무장 가능성을 검토하는 비밀보고서를 작성하게 함 . 나카소네 야스히로(당시 방위청 장관), 로야마 미치오(비밀 핵무장 보고서 책임자) 인터뷰 - 사토 이전부터 계속되어 온 일본의 핵정책 . 신성택(대량살상무기 전문가), 후지타 유코(게이오대 과학사 교수), 나카네 료헤이(당시 원폭개발팀) 인터뷰 - 원자폭탄제조를 염두에 둔 원자력발전소 . 숀 버니(그린피스 반핵정책국장) 인터뷰 - 준핵보유국인 일본 . 핵연료 재활용 정책을 명분으로 외교전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30년 포괄 동의안'을 얻어냈음 . 신성택, 오마에 겐이치(일본 고속증식로 설계자) 인터뷰 - 최근 일본의 우경화 바람과 핵 무장 . 평화와 핵무장이라는 일본의 두 얼굴 . 니시무라 신고(전 방위청 차관), 이종원(릿코대 국제정치학 교수), 후지타 유코, 김태우(한국국방연구원 군비통제연구실장) 인터뷰 48:37- 다음회 예고 49:53- 후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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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5, 11회 | 20050605 | 52분 | 상세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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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락치> 내용
문민정부 시대에도 그 누구든 프락치의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 실을 보여준, 김삼석 남매간첩단 사건! 안기부의 프락치였던 백흥룡씨와 <민변>의 인터뷰 비디오는 물론, 당시 백씨에게 프락치 활동을 강요하던 안기부 직원들의 얼굴 모습과 백흥룡씨가 직접 녹음한 프락치 공작에 관 한 충격적인 육성 고백을 공개한다. 한편, 80년대 초반 전두환 신군부의 잔인한 사찰 방법이었던 녹화 사업. 그들은 학내외 집회 및 시위 차단을 목적으로 운동권 학생들을 강제 징집 해 특별교육을 시키고 보안사의 프락치 활동을 강요했었다. 그 중 87년, 카투사 이층침대에서 의문사한 김용권씨 사건을 통해 20년이 지난 지금까 지 풀리지 않는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들과 유가족에게 남겨진 고통에 서 드러나는 프락치 공작의 폐해들을 짚어본다. 00:00- 타이틀 00:13- 프롤로그 01:39- 전CM 03:58- 오프닝(김환균) 04:42- 김삼석 남매간첩단 사건과 안기부의 프락치 백흥룡 - 간첩단 사건으로 체포된 김삼석 남매 . 김은주(93년 간첩사건으로 피소), 김삼석(93년 간첩사건으로 피소) 인터뷰 - 사건에서 사라진 배인오 . 김은주 인터뷰 - 배인오(본명 백흥룡)와 김삼석 남매 . 배인오의 영화 <이름없는 영웅들>(1991) . 김삼석, 김은주 인터뷰 - 간첩사건 조작 항의와 백흥룡에 대한 프락치 의혹 . 김성민(작곡가, 영화 '이름없는 영웅들' 제작 참여), 백흥룡의 영화 운동 동료, 김은주, 이기욱 변호사(김삼석, 김은주 남매 사건 변호인) 인터뷰 - 백흥룡의 도주와 양심선언 . 김정수(당시 백흥룡의 베를린 양심선언 권유, 지원) 인터뷰 - 양심선언 녹취와 백흥룡이 촬영한 안기부 직원들 얼굴과 육성 . 김은주, 이덕우 인터뷰 - 1995년 국회정보위원회에서 안기부 프락치 운용 시인 . 안기부 권한 축소 문제와 맞물려 발생했던 김삼석 남매 간첩단 사건 . 유준상(전 국회의원, 당시 국회정보위 소속), 이덕우, 이기욱 인터뷰 - 양심선언 후 백흥룡의 행적 20:34- 학생운동권 주변에 늘 존재해왔던 프락치 - 김삼석(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인터뷰 - 임종석 검거와 프락치 의혹 . 전문환(당시 전대협 산하 평양축전 준비위원장), 이남훈(당시 전대협 정책위원장) 인터뷰 - 프락치 본인에게서 듣는 활동 고백 . 이시현(당시 전남대 학생회 간부), 염규홍(전 '인권하루소식' 편집인) 인터뷰 - 신군부의 최우선 과제였던 학원통제 . 유시민(서울대 78학번, 84년 복학생협의회장) 인터뷰 - 또 하나의 사찰기관이 되어버린 학교 . 한만중(85년 서울대 학생회 간부) 인터뷰 . 학생처 학내사찰 보고자료 - 운동권 내부의 회의록까지 입수해 파악 . 김삼석 인터뷰 33:12- 보안사의 실태 - 김병진이 얘기하는 보안사의 실태 . 1988년 출간된 '보안사' . 김병진('보안사' 저자), 김삼석 인터뷰 - 군 정보기관이 개인의 모든 정보를 파악, 사찰 .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 . 학생에서부터 야당정치인에 달하는 무차별한 민간인에 대한 사찰과 동향 보고 - 녹화사업을 통한 프락치 행위 강요 . 1988년 5.18 진상조사 국회 청문회 . 군 녹화사업 관련 의문사 자료 . 유시민(1980년 강제징집), 한만중(1986년 강제징집) 인터뷰 - 보안사 프락치 강요에 시달리다 내무반에서 자살한 김용권 사건 . 박명선(고 김용관 어머니), 이종준(고 김용권 군생활 동료) 인터뷰 48:42- 에필로그 49:06- 다음회 예고 50:34- 후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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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5, 10회 | 20050529 | 57분 | 상세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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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궁정동 사람들> 내용
10.26 총격 직후, 10월 27일 새벽 5시에 처음 사건 현장에 도착한 육군 과학수사연구소 현장감식팀이 촬영한 현장 사진을언론사상 최초로 공개한 다. 취재진은 연회장 내부, 대통령의 양복 상의와 구두 등 유류품, 차지 철 손목 총상 사진 등 미공개 사진과 현장감식관들의 생생한 증언을 최초 발굴, 공개한다. 대통령의 최후를 목격한 심수봉은, 합수부에서 자신이 진술한 내용은 없 던 걸로 해야한다며, 사건 정황에 대한 새로운 증언을 들려준다. 00:00- 타이틀 00:12- 프롤로그 02:16- 전CM 05:05- 10.26, 김재규의 우발적 범행 여부에 대한 계속되는 논란 - 10.26에 대해, 주범인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거사였다고 주장했고, 김계원 비서실장과 정승화 육참총장은 김재규의 성격적인 결함에 의한 우발적인 범행이었다고 말했고, 계엄하 합동수사본부는 김재규가 자신의 무능을 은폐하고, 권력 찬탈을 기도한 패륜적 범죄라고 결론짓고 수사를 종결했다. 하지만 이런 논의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있다. 당시 현장에는 현장에서 즉사한 6인과, 김재규와 함께 형장에 오른 5인 외에 30여명의 궁정동 요원들, 이들은 근접 거리에서 사건을 경험했고, 현재까지 생존해 있다. - 총격 장소 궁정동 안전가옥 나동(양옥) 내부 공개 . 지장현(전 육군과학수사연구소 총기감식관) 인터뷰 - 26일 오후 4시부터 27일 오전 7시까지 10.26 사건 재구성 . 김계원(전 대통령 비서실장), 심수봉(연회 참석 가수), 김병수 (전 국군 서울지구병원장) 인터뷰 13:12- 오프닝(김환균) 14:07- 궁정동 안가 - 93년 문민정부의 등장과 함께 전부 철거된 것으로 알려진 안가 (본관)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확인, 미니어처로 제작 공개, 궁정동 안가의 경호와 관리는 중앙정보부에 일임되었고, 청와대 경호원들이 철통같은 무장이 해제되는 유일한 곳이 바로 궁정동 안가, 그곳의 책임자인 박선호 의전과장은 김재규의 거사통보를 받은지 단 30분만에 거사에 합류할 경비원들을 조직. - 무궁화 동산(궁정동 안가 '나동'이 있던 자리) . 유석문(전 중정부장 운전담당 사무관) - 1988년 국회청문회, 고 정승화(전 육군참모총장) 발언 - 당시 대통령 전용 막걸리 제조시설 . 박관원(당시 능곡양조장 사장), 김일선(전 궁정동 안가 요리사) 인터뷰 - 10.26 당시 상황 회고 . 강신옥(변호사, 김재규.박선호 변호), 유석술(당시 궁정동 연회장 정문 경비) 인터뷰 29:21- 거사에 가담한 박흥주(당시 육사 출신 현역 육군 대령) - 박흥주 대령의 유서 - 중구 행당동 달동네 박흥주 대령이 살던 집 . 허전(목사 박흥주 육사 동기) 인터뷰 - 박흥주 옥중 수양록 . 유석문(전 중정부장 운전담당 사무관), 김학호(전 중앙정보부 감찰실장) 인터뷰 35:33- 막바지에 이른 유신독재, 장기 집권에 대한 저항 - 고 이재전(전경보실 차장), 임웅환(당시 청와대 경호관), 유석문 (전 중정부장 운전담당 사무관) 인터뷰 38:32- 김재규의 거사 계획과 목적 - 거사 후 "육본으로의 유턴"에 대해, 수사를 담당했던 합수부는 정권찬탈의 목적의 방증이라고 했고, 사건 이후 지금까지 10.26이 사전에 치밀한 계획이 없는 우발적인 거사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증거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육본행이 정권찬탈 목적이나, 우발적인 선택이 아니라는 새로운 증언이 나왔다. 거사 직전, 궁정동 안가 본관에 정승화 총장이 와있다는 사실을 들은 박흥주와 박선호는 사건이 총장과 사전에 모의된 조직적인 거사라고 생각했고, 김재규 역시 육사 후배이며 자신의 천거로 총장의 자리에 오른 정승화가, 자기편에 서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육본으로 향하는 차를 몰았던 운전기사 유석문은, 대통령의 서거 사실을 최초로 알게 된 정승화 총장이 북의 도발을 염려하는 대화를 들은 박흥주가 "군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선 육본으로 가는게 좋겠다"는 합리적인 판단 하에 제안했다고 증언한다. 하지만, 맨발에 와이셔츠 차림으로 육본에 도착한 김재규에게 거사 이후의 계획은 없었고, 10.26은 박대통령의 저격에서 끝이 난다. - 당시 궁정동 신관 경비원 회고 . 노수길(당시 궁정동 안가 관리직), 유석술(당시 궁정동 나동 정문 경비) 인터뷰 - 고 정승화(전 육군참모총장 1996년 기자회견 당시 증언) - 유석문(전 중정부장 운전담당 사무관) 당시 상황 회고 . 임웅환(전 청와대 경호관), 강신옥(변호사, 김재규.박선호 변호), 유석술(궁정동 경비원) 회고 52:12- 80.5.24 김재규 사형 집행, 80.9.1 김두환 대통령 취임 54:38- 다음회 예고 55:48- 후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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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5, 9회 | 20050522 | 56분 | 상세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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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로 지배하라, 5공화국 3S 정책> 내용
'스포츠 대통령' 전두환. '스포츠 대통령'이란 말만큼 그에게 걸맞은 수 식어는 없다. 아직도 스포츠계에선 스포츠에 대한 그의 관심과 배려가 전 설로 내려오고 있을 정도다. '선진체육입국'이란 엉뚱한 슬로건 하에 86 년 88년을 금과옥조처럼 읊조리며 박수부대로 동원됐던 기억들. 군사정권 하에서 으레 벌어질 수 있는 일상으로 치부하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전두환 정권이 스포츠를 명백한 정치적 목표의 달성을 위해 이용 했다면 쓴웃음으로 그칠 일은 아니다. 이 프로그램에선 5공 전두환 정권의 올림픽 유치와 프로야구의 출범이 명백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됐다는 가설을 입증하고 자 한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가 전두환 정권 초기 안정에 얼마나 기여했 는지를 구체적인 증거를 들어 보이고자 한다. 00:00- 타이틀 00:14- 프롤로그 01:08- 전CM 03:41- 오프닝(김환균) 04:38- 프로야구의 출범은 청와대의 기획 - 83년 해태 타이거즈 우승 당시, 경기장에 울려퍼진 '목포의 눈물' . 임채준(당시 해태 타이거즈 주치의) 인터뷰 - 창단 초의 해태 타이거즈와 광주 시민들의 응원과 기대 . 임채준, 김봉연(당시 해태 타이거즈 선수), 손희광(당시 해태 타이거즈 홍보 담당) 인터뷰 - 5월 18일 전후로는 경기가 열릴 수 없었던 광주 . 이용일(KBO 초대 사무국장), 이호헌(KBO 초대 사무차장) 인터뷰 - 광주 사람들의 한을 달래준 위안이었던 가난한 야구단 해태 . 임채준, 손희광 인터뷰 - 프로야구의 정치적 의도가 성공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해태 열풍 . 박영길(당시 롯데 자이언츠 감독), 안민석(스포츠 사회학자) 인터뷰 - 프로야구 출범은 정부의 탈정치화 의도로 계획된 것인가 . 이호헌, 이상주(당시 청와대 교육문화 수석비서관) 인터뷰 - 한국 프로야구 창립 . 광주 연고지 선정 과정의 어려움 . 이호헌, 이상주, 손희광 인터뷰 - 프로야구 출범을 서둘러야 했던 이유 . "스포츠 대통령 전두환" . 이용일, 이방원(당시 경향신문 체육 기자) 인터뷰 21:46- 바덴바덴의 기적은 연출된 기적 - 81년 9월, 88년 올림픽 서울 유치 발표 - 국내의 올림픽 유치 반대 분위기 . 이방원('세울 꼬레아'의 저자), 이상주, 김영기(당시 KOC 위원)인터뷰 - 전두환 대통령의 명으로 유치 준비 시작 . 이상주, 이방원 인터뷰 - 아디다스의 회장 다슬러와 맺은 밀약으로 올림픽 유치 성공 . 유치단 출발 전 세계 스포츠 인사들과 잘 아는 박종규 전 청와대 경호실장이 합류 . TV방영권과 마케팅 요구 수락 . 이방원, 최만립(당시 KOC 명예총무, 당시 올림픽 유치단) 인터뷰 - 극적으로 바뀐 유치단의 운명 . 국무총리가 된 유창순, 대한체육회장에 오른 정주영, IOC위원이 된 박종규 - 전두환 대통령이 올림픽 유치에 집착했던 이유 . 광주학살을 덮고 국론을 통일시킬 계기가 필요 . 세지마 류조의 권유 33:04- 5공화국 통치전략의 핵심으로 이용된 올림픽 - 통행금지 해제와 유흥가 성업 . 류시춘(당시 고교 교사), 위성삼(광주 5.18 민주화 운동 유공자) 인터뷰 -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없던 자율과 개방 . 심야극장의 등장과 파격적 검열 완화, 여전한 정치적 검열 . 정인엽(애마부인 감독), 박광수(영화감독), 이장호(영화감독) 인터뷰 - 88올림픽을 대비 체육을 생활화 하자는 정부의 방침 . 대통령 지시사항으로 83년 전국에 국민체조 보급 . 선진조국의 창조를 위한 길, 체육 - 올림픽을 위한 정부의 정책 . 88올림픽 꿈나무 선발을 위한 전국 청소년 600만명을 대상으로 한 체력 검사 . 보다 많은 금메달이라는 목표를 위해, 재벌 총수들까지 동원해 파격적인 지원 . 메달을 딴 선수들에게도 파격적인 혜택 . 신동성(당시 대한체육회 연구부장, 스포츠 과학자), 안한영 (당시 레슬링 국가대표 코치) 인터뷰 - 도시 미관 정비 명목으로 공권력과 용역까지 동원해 재개발 . 이태교(서울 돈암동 철거민) 인터뷰 - 올림픽을 위해 거리로 내몰린 빈민들 . 김혜경(민주노동당 대표, 당시 빈민운동가), 철거민들 인터뷰 - LA 올림픽을 활용한 홍보 대책 수립 실행의 지시를 내린 전두환 . 향후 총선을 위한 정치 홍보 방안으로 만들겠다는 정치적 의도 . KBS MBC에서 3시간 동시 생중계한 LA올림픽 선수단 개선 환영, 그 주인공은 전두환 대통령 . 김영기, 고광헌(스포츠 평론가) 인터뷰 - 정권초기의 분위기를 대반전시킨 LA올림픽의 성공 51:31- 87년 고 이한열 열사 장례식 - 시위대에 의해 내려진 올림픽기 52:17- 클로징(김환균) 53:10- 다음회 예고 54:19- 후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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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5, 8회 | 20050515 | 49분 | 상세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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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타잔, 박흥숙> 내용
1977년 4월20일, 광주 무등산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자신의 무 허가 집이 철거되는 것에 격분한 21살의 청년 박흥숙이 철거반원 4명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사건 후 그는 '무등산 타잔'이라 불리며 평소 엽기적 인 행각으로 살아온 인물로 보도된다. 00:00- 타이틀 00:26- 전CM 02:44- 프롤로그 06:43- 오프닝(김환균) 07:12- 구명회원들이 말하는 인간 박흥숙 - 김현장(박흥숙 사건 르포 작성) 인터뷰 - 구명운동의 불씨가 됐던 월간잡지 '대화' 르포 기사 09:49- 무등산 타잔 박흥숙 여동생 박정자 인터뷰 - 그날의 강제 철거 현장 목격자 증언 - 생존 철거반원 김모씨 전화 인터뷰 17:08- 1971년 광주대단지 - 손학규(경기도지사, 당시 빈민운동 참여), 김혜경(당시 빈민 운동 참여), 박진도(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박순일(한국 보건 사회연구원 원장) 인터뷰 22:27- 청계천 판자촌, 이철용(전 국회의원, 빈민운동가) 인터뷰 24:33- 광주 무등산 덕산골 무허가촌 도시빈민이 된 박흥숙 - 김대옥(당시 광주시 동구청 건축지도계), 권진옥(박흥숙 사건 1심 변호사) 인터뷰 - 광주 무등산 덕산골, 박흥숙이 공부하던 의서 . 박정자(박흥숙의 여동생) 인터뷰 30:09- 철거 현실을 외면한채 엽기적인 살인사건으로 몰아간 언론 - 박화강(당시 전남 매일기자, 전 한겨레 사회부 국장) 인터뷰 - 외압으로 과장 왜곡된 신문 기사들 - 김대옥(당시 생존 철거반원) 인터뷰 38:13- 강제철거의 또다른 희생양 철거반원들 - 피해 철거반원 부인 인터뷰 - 박흥숙 자필 최후 진술서, 이기홍(2심 재판 변호사) 인터뷰 42:01- 계속되는 강제철거의 진정한 승자 - 김대옥(당시 광주시 동구청 건축지도계), 손학규(경기도 지사, 당시 빈민운동 참여), 이철용(전 국회의원, 빈민운동가), 하성 규(중앙대 도시 및 지역계획학과), 김현장(당시 박흥숙 사건 르 포기사 작성) 인터뷰 46:05- 에필로그 46:58- 다음회 예고 48:15- 후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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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5, 7회 | 20050508 | 49분 | 상세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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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진보, 3부- 혁명의 퇴장, 떠난자와 남은자> 내용
1989년 6월 4일,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시위대를 향해 살상을 감행한다. 인민의 군대가 인민을 향해 총을 겨누면서 수천 명이 희생된 '천안문 사 태'는 한국의 좌파들에게 충격이었다. 이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 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되면서 그들은 혼란에 빠진다. 이어 80년대의 폭력혁명 운동방식에 대해 강하게 문제를 제기하며 '신노 선'이 등장한다. 합법적 대중운동 노선을 선택했던 이들은 92년 '한국노 동당'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본격적으로 선거에 참여한다. 하지 만 한명도 당선되지 못하고 결국 민중당은 해산되고 만다.현존 사회주의 붕괴와 민중당 실패 후, 80년대 혁명을 꿈꾸며 공장으로 간 학생들은 노 동 현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노동 현장을 떠난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가거 나 시민운동 등 전문영역을 개척해나간다. 00:00- 타이틀 00:13- 프롤로그 01:41- 전CM 03:58- 정치 제도권으로 진입한 진보세력 - 2004. 3.15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후보 경선 - 김종필 낙선과 노회찬 당선,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10명 당선 07:34- 오프닝(김환균) 08:11- 사회주의가 몰락하자 한국의 좌파들이 충격에 빠지다 - 1989년 중국 천안문 사태, 1991년 5월 투쟁 . 주대환(당시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준위 대표), 송영길(당시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준위), 원희룡(위장취업), 전성(당시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준위 조직부장), 이해영(한신대 국제관계학 교수), 최홍재(1991년 고려대 총학생회장), 황광우(당시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준위 편집부), 노회찬(당시 한국사회주의 노동당 창준위) 인터뷰 - 한국사회주의노동당창준위 중앙위회의 명단 . 윤영상(당시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준위 서울대표), 박장근 ('노동자의 힘' 대표), 김창한(당시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준위 인천대표) 인터뷰 17:30- 혁명의 퇴장, 90년대의 새로운 실험 - 1992년 한국노동당 창당 발기인대회, 민중당 서울 동작지구당 대회 . 윤난실(당시 한국노동당 창당 발기인), 조승수(당시 민중당 울산지역 당원), 이준모(당시 민중당 안산지역 노동자 당원), 민영창(당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인터뷰 - 14대 국회의원 선거 민주당 연설회 장면 . 박상옥(당시 민중당 구미지역 당원), 조승수(당시 민중당 울산 지역 당원), 김문수(당시 민중당 비례대표 후보) 인터뷰 22:16- 공장으로 간 지식인들, 대규모 이탈이 시작되다 - 강명자(구로동맹 파업으로 구속 후 해고) 인터뷰 34:37- 시민운동으로 새롭게 변모한 운동권세력 - 위장취업 후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하던 김문수는 뒤늦게 학교를 마치고 민주자유당에 입당, 사법시험에 통과해 변호사의 길을 걷던 송영길과 원희룡도 정계에 진출, 혁명의 길을 포기하고 제도권 안으로 들어간 그들의 증언과 그들을 향한 평가들 - 조근래(구미 경실련 사무국장), 정영대(인하대 교수) 인터뷰 . 김동춘(성공회대 교수), 김미숙(영월군 농민회), 윤영상(당시 진보정당 추진위) 인터뷰 - 1992년 진보정당 추진위 발족 기자회견 . 윤난실(당시 진보정당추진위 광주지부 사무국장), 주대환(당시 진보정당추진위 정책위원장), 단병호(당시 전노협 위원장) 인터뷰 40:12-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진보세력의 출범과 향후 과제 - 1996.12.26 국회 노동법 날치기 통과 . 심상정(당시 민주금속연맹 사무처장), 김영미(당시 보건의료 노조 재정국장) - 2000 민주노동당 창당대회 - 2004년 비정규직 노동자 타워크레인 고공 농성 현장 47:35- 다음회 예고 48:43- 후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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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5, 6회 | 20050501 | 51분 | 상세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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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진보, 2부- 인민노련 혁명을 꿈꾸다> 내용
1987년 대통령 선거는 6월 항쟁이 끝나고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는 최초 의 선거였다. 당시 민중운동 세력의 다수는 김대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 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백기완 후보는 민주연립정부를 주장하며 등장한다 . 그 중심에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이 있었다. 1980년대 중 반부터 대학가에는 반미시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운동권에 주체사상 이 확산되어 갈 무렵, 인민노련은 주체사상파와 대립해간다. 결국 인민노 련은 1987년 10월에 열린 2박3일 간의 비밀 대의원대회를 끝으로 주체사 상파와 결별하게 된다. 1989년 노태우 정권은 공안정국으로 회귀하며 민중운동 세력에 대한 압 박에 나섰다.당시 구속된 윤철호, 오동렬 등 조직의 중앙위원들은 당시 법정에서 자신의 사회주의 사상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 또 한번 사회에 파 문을 일으켰다. 노동현장에 뿌리를 둔 인민노련, 1991년 8월 전국적 지하 정당을 결성한다. 그러나 감격도 잠깐, 금방이라도 세상을 뒤엎을 것만 같았던 이들 앞에는 거대한 역사의 해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00:00- 타이틀 00:13- 프롤로그 01:44- 전CM 03:48- 1987년 대선, 독자 후보 백기완 진영의 중추세력 인민노련 - 1987년 6월 항쟁, 6.29 선언 - 1987.8.8 김대중 통일민주당 입당, 대통령 출마 선언 - 백기완 후보의 대학로 유세 10:25- 오프닝(김환균) 11:02- 1987년 6월 26일, 한국전쟁 이후 최대 지하조직 인민노련 발족 - 1985년부터 조직의 뼈대가 형성되기 시작한 인민노련은 1987년 2월 7일 박종철의 추모 집회장에서 처음 등장 인민노련은 살인 고문 강간 정권 타도투쟁위원회(타투)라는 이름으로 서울 지역 원정시위에 나섰다. - 당시 인민노련 조직원이었던 노회찬.조승수.송영길 의원, 주대환.황광우.최봉근.신지호 인터뷰 18:50- 인민노련, 1987년 10월 대의원대회에서 주체사상파와 결별 - 1980년 광주학살의 미국의 역할에 대한 의혹이 증폭 1980년대 대학가에는 반미시위가 본격적으로 시작 김영환의 '강철서신' 으로 '주체사상'확산 당시 인민노련 조직원들은 김일성 중심의 수령론과 비민주주의적인 북한사회에 대하여 강하게 비판 결국 인민노련은 1987년 10월에 열린 2박3일 간의 비밀 대의원대회를 끝으로 주체사상파와 결별 -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 . 박상옥(당시 인민노련 조직원), 주대환(당시 인민노련 중앙집행 위원장), 심진구(당시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으로 구속), 홍진표 (1987년 서울대 총학생회 사무국장, 당시 주체사상파), 최홍재 (당시 주체사상파), 송영길(당시 인민노련 조직원), 신지호(당시 인민노련 조직원), 노회찬(당시 인민노련 중앙위원) 인터뷰 - 1987년 10월 인민노련 대의원대회, 인민노련 사건 판결문 . 신지호(당시 인민노련 조직원) 인터뷰 27:19- 1989년 구속된 인민노련 조직원들, 법정에서 자신의 사상을 선언 - 1989년 노태우 정권은 공안정국으로 회귀하며 민중운동에 대한 압박 착수, 선동 배후세력 즉시 검거 선포 당시 인민노련 사건 의 치안본부 수사팀장이 인민노련 지도부를 구속하기까지 집요 한 추적과정 공개 - 1987년 7.8.9 노동자 투쟁, 당시 인민노련 조직원들 인터뷰 - 1989년 청와대 좌경세력 대책회의 - 인민노련 사건 구속자 최후진술 - 1990.1.22, 3당 합당 선언,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결성대회 . 박성인(한국노동이론 정책연구소) 인터뷰 - 당시 전노협 위원장 단병호 구속 . 단병호(당시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위원장) 인터뷰 40:55- 인민노련 1991년 전국적 지하정당 결성 - 노동현장 지하조직을 통합 전국 20개 지부 600명의 정조직원을 둔 지하정당 결성 - 지하조직들 상호 질의답변 문건 - 삼민동맹, 노동계급, 인민노련 등 통합합의문 . 최봉근(당시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준위) 인터뷰 - 계룡산에서 비밀리에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단준위 회의 . 민영창(당시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준위 사무국장), 윤영상(당시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준위 서울대표), 김창한(당시 한국사회주의 노동당 창준위 인천대표), 전성(당시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준위 조직부장) 인터뷰 - 1992년 한국노동당 창당발기인대회 . 윤난실.최봉근.박상옥(당시 창당 발기인) 인터뷰 48:36- 다음회 예고 49:40- 후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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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789-0123- 평일:09:00~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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